올해는 이인성과 함께 대구를 대표하는 또 한 명의 서양화가 이쾌대가 탄생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다. 1913년 1월 16일 경북 칠곡군에서 태어나 1923년 신동초등학교에서 대구수창초등학교로 전학을 온 후 대구에서 유년기를 보낸 이쾌대는 그보다 나이가 한 살 많았던 이인성과는 초등학교 동기동창생이었다. 이인성이 조선의 향토색 구현을 위한 담론을 작품으로 표현하였다면 이쾌대는 새로운 시각적 전통과 진보적 리얼리즘을 통해 시대정신을 표출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 한국전쟁이라는 혼란과 격동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대표적인 예술가들이기도 하다. 특히 올해는 한국전쟁 정전협정 60주년을 맞는 해로 월북화가 이쾌대에 대한 재조명과 그의 예술세계를 탐구하는 시간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단순히 망각 속 예술가에게서 느낄 수 있는 동정심이나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 이쾌대가 파국의 시대상황에서 새로운 서사적 작품세계를 처음으로 시도했다는 점과, 조선 향토색론의 비현실성을 극복하고 진정한 리얼리즘 세계를 구현했다는 점 등은 한국미술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평가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그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의 전통적 관점에서 서구미술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접목하였는지를 새롭게 탐구하며 사회적인 혼란기 속에서 예술가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미학적 태도 역시 새로운 시각에서 담론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업들이 곧 우리 현대미술을 읽어내는 주요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의 삶과 작품 그리고 그곳에 드리워 있는 어둠과 밝음은 우리 현대사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술가로서의 개인적 삶은 개인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가 표현하고 만들어낸 작품들이 사회적 의미를 지닐 때 그것은 분명히 역사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월북예술인들에 대한 해금조치가 이루어진 지도 25년이 지났다. 월북화가 이쾌대의 개인적이고 정치적 한계점에서 벗어나 서구문화의 수용에서 표명하고 싶었던 그의 시대정신과 민족의식은 분명 정체성의 혼란기에 예술인들이 가져야 할 책무를 잊지 않고 있었던 예술가로 그를 인식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고 있다. 이쾌대가 한국 근대미술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북쪽을 선택한 지도 60년이 지난 지금 늦은 감은 있지만 그의 예술적 의미를 새롭게 탐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지역 예술인들에 대한 연구와 재조명은 결국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을 통해 진정한 우리다움을 찾는 길이기 때문이다.
김태곤(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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