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중구 터줏대감들 '대구 이야기'…'생애사 열전' 발간

곡주사 할매 등 14명

인물사진-허귀진 씨, 차석규 씨, 정옥순 씨, 곽종한 씨. 대구 중구청은 19일 중구 역사를 장식했던 터줏대감 14명의 이야기를 담은
인물사진-허귀진 씨, 차석규 씨, 정옥순 씨, 곽종한 씨. 대구 중구청은 19일 중구 역사를 장식했던 터줏대감 14명의 이야기를 담은 '생애사열전 100선 사업' 중 12권을 출간했다. 주인들로부터 구술을 받는 모습과 출간된 책.

"곡주사(哭呪士) 할매죠. 학생들이 처음에 신진식당, 그러고 난 다음에 곡주사 할매라고 불렀어요."

정옥순(79'여'대구 중구 대봉동) 씨는 책 첫머리에 자신을 '곡주사 할매'라고 소개했다. 곡주사는 1974년 유신정권 당시 대구 중구 덕산동 염매시장에 터를 잡은 막걸릿집이다. 곡주사라는 이름은 다음해 인혁당 사건이 일어난 후 '슬픔과 분노로 통곡하면서 박정희 정권을 저주한다'는 뜻을 담아 대학생들이 붙여줬다. 이름에서 보듯 곡주사는 유신과 군부독재 시절 가난한 운동권 학생들의 사랑방 역할을 해왔다.

학생들의 이모였고 어머니였던 정 씨의 삶이 19일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졌다. 대구 중구청의 도움을 받아 그가 풀어낸 생생한 이야기들은 한국 현대사의 우여곡절을 그대로 담고 있다.

대구 중구청은 19일 중구 역사를 장식했던 터줏대감 14명의 이야기를 담은 역사책 12권을 출간했다. 중구청은 지난해 3월부터 중구에 머물렀던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생애사(生厓史) 열전 100선 사업'을 시작했다. 이번 사업은 대구 도심의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시대를 경험하거나 기억하고 있는 70세 이상 어르신 100명을 대상으로 각자의 생애 전반을 기록하는 것이다.

◆역사가 된 평범한 이웃 14명의 일상

14명의 주인공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다. 배상용(84'중구 대안동) 씨는 북성로 공구골목의 1세대로 요즘도 공구골목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60년 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공구를 취급하는 노점상으로 시작해 1970, 80년대 공구 사업의 황금기를 겪었다.

20대 후반 중구 도원동에 있는 신광타올 본사 공장에서 경비직으로 타올 업계에 뛰어든 이윤환(72'중구 동삼동) 씨는 이곳에서 알음알음 배운 염색기술이 그의 한평생 업이 됐다. 이후 그는 대구지역의 타올 공장인 삼천리'조광 등을 전전하다 30년 전 중구 동산동에 타올 전문점 대동상사를 직접 차려 지금도 운영하고 있다.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으로 알려진 월계서점을 운영했던 차석규(81'중구 남산동) 씨는 분단의 아픔을 직접 경험한 사람 중 한 명이다. 1952년 고향인 거창에서 거창 양민학살을 겪은 후 대구로 가족을 이끌고 와 중구 남산동 남문시장에 6m²남짓한 가게에서 월계서점을 열어 2010년까지 운영했다.

1973년 중구 동성로 대구백화점 부근에서 맞춤 양복점 '봉봉라사'를 개업한 곽종한(71'중구 대봉동) 씨를 통해 중앙로와 동성로에 즐비했던 양복점이 사양길로 접어들기까지의 모습을 들을 수 있다. 또 중구 반월당에서 낚시점을 39년째 운영하고 있는 박성삼(75'중구 봉산동) 씨, 약령시에서 한약과 함께 평생을 보낸 박재규(82'중구 장관동) 씨 등 자기만의 분야에서 달인이 된 이들이 풀어낸 대구지역의 변화상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더불어 이들이 그려내는 중구 원도심의 옛 풍경, 자식 키우는 이야기 등은 생애사에 감칠맛을 더한다.

◆역사책서 보기 힘든 여성 삶 눈길

역사책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여성들의 삶을 풀어낸 이야기는 이번 사업의 백미로 꼽힌다.

초대 대구시장 허억의 딸로 태어난 허귀진(91'여'중구 하서동) 씨의 삶 속에는 옛 여성들의 삶과 한국의 근현대사를 엿볼 수 있다. 허 씨의 생애사에는 그가 일제강점기 학창 시절을 보낸 후 독립운동가 시아버지와 건축가 남편을 만나 집안의 종부와 어머니로 지내다 이제는 할머니가 된 모습을 담백하게 그려냈다.

상주에서 부잣집 딸로 태어나 명문 여고까지 졸업했지만 자아실현을 하지 못했던 백영자(83'여'중구 수창동) 씨는 한국 여성이 감내해야 했던 사회적 불평등을 자신의 생애사에 녹여냈다.

중구청에 따르면 이번 생애사 사업의 핵심은 '사람들 속에 도시가 있다'이다. 대구의 도심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사람들의 삶이 모여 현재 대구 도심의 역사와 문화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중구청은 도심의 역사를 복원할 주인공들을 앞으로도 계속 찾을 계획이다. 참여를 원하는 사람은 이달 말까지 중구청 또는 도심재생문화재단 홈페이지에 본인이나 타인을 추천하면 된다.

윤순영 중구청장은 "각자의 평범한 삶들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 발견되는 원도심 중구의 역사와 문화는 우리 지역의 근대역사 문화벨트 구축 및 관광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신선화기자 freshgirl@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