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내 한 몸 돌아서면 충분한 것을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팔이 안으로만 굽는다 하여

어찌 등 뒤에 있는 그대를 껴안을 수 없으랴

내 한 몸 돌아서면 충분한 것을

(이외수의 '날마다 하늘이 열리나니')

세상에는 눈물에 적시지 않은 단어들로 가득하다. 가득한 단어들 사이에는 온갖 욕망들이 꿈틀거린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잔잔하게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눈물보다는 단지 상대방의 동의를 끌어내기 위해 표피적으로만 아름다운 단어, 위선의 눈물만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거 아는가? 아무리 아름다운 단어도 눈물에 적시지 않고 원고지에 파종하면 말라죽는다는 사실을.

눈물은 위대하다. 이외수의 글을 읽다가 갑자기 춘천에 다시 가고 싶었다. 안개가 주는 아늑함과 암담함, 눈물이 주는 후련함과 슬픔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몇 번이나 떠나려고 하다 중단하곤 했던 마음의 무게가 힘들었다. 언젠가 안개로 가득한 춘천이라는 도시를 만난 것은 차라리 나에겐 추억이었다.

저녁으로 먹은 닭갈비, 그리고 약한 빗줄기에 젖어 가로등에 붉게 비친 등나무 넝쿨, 아침에 만났던 의암호 맑은 물빛, 그리고 '해우'(海牛)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었던 청평사. 그것만으로도 추억이 되기에 충분한 기억의 공간이다. 이따금 그 기억을 되새김질할 때마다 오는 느낌. 결국 진정한 마음은 감성에서 시작한다는 것. 외로움이나 그리움, 슬픔 같은 것이 엄청난 에너지라는 것. 외로움, 그리움, 슬픔 같은 마음은 결코 패배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는 본질적인 표식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단어도 그 표식에 적시지 않고 원고지에 파종하면 말라죽는다.

모임에서 사람들과 만났다. 우연히 얼마 전에 썼던 내 낙서에 '아팠다'는 표현이 마음에 남아 위로하기 위해 왔단다. 대부분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 함께 지낸 시간도 제법 길었다. 최근 문단에 대한 얘기도 오갔다. 어떤 사람은 '예술이 도구로 쓰이면 예술이 안 된다. 체제나 사상을 선전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 예술은 예술로서 값어치가 없다'라고도 했다. 정치와 예술의 관계에 대한 얘기도 오갔다. '예술이 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으로 사용될 때 진정한 국민화합의 길이 있다'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함께 모인 사람들은 타인의 이야기를 가슴으로 듣고 있지는 않았다. 단지 자신의 생각을 드러냄이 중요했다. 무척 친한 사람들인데 생각의 다름은 인정하지 않는 묘한 분위기. 인간이 비록 정치적 동물이긴 하지만 정치가 인간의 일상조차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쓸쓸했다. 팔이 안으로만 굽는다고 등 뒤에 있는 그대를 껴안을 수 없겠느냐. 내 한 몸 돌아서면 충분한 것을.

퇴행현상. 일상이 주는 길을 걷다가도 나도 모르게 어떤 사물을 대할 때 퇴행현상이 슬그머니 일어난다. 그 사물이 왜 퇴행현상을 일으켰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냥 그렇다. 내 무의식 속에 그 사물을 담은 기억이 존재하는가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걸어온 발자국을 지운다고 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내 기억의 밑둥치에 있는 양철 지붕의 초등학교 건물, 그 아래 빗방울 떨어지는 자갈길. 아마도 그 장소와 소리를 기억하는 그 부분부터 내 삶의 길은 정해졌는지 모르겠다.

철밥통이라 불리는 선생이란 직업을 지니고서 언제나 답답해하면서 하루를 살았다. 그 옛날 화단 앞에 있던 자갈에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들으면서부터 난 그 행복한 기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었던 게다. 그 호젓함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던 게다. 그 꿈을 여전히 온전하게 펼치지 못하고 있는 내 자화상에 대한 답답함이었을 게다. 멀리 있어 그리운 이름들. 이미 화석이 되어 굳어버렸다고 하더라도 이름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다. 여전히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욕망, 그건 역시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지난날의 모든 꿈들을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그것이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