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비극배우 전옥의 삶과 노래(상)

'눈물의 여왕'으로 유명, 강홍식과 함께 음반 발표

1950년대 대구에는 제법 이름 있는 극장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10대 후반의 소년이었던 나는 아버지를 따라서 극장 구경을 더러 다녔습니다. 참으로 오래된 극장인 만경관(萬頃館)도 갔었고, 대구극장에도 갔었습니다. 아버지가 즐겨 찾던 극장의 프로그램은 주로 비극을 테마로 하는 영화였습니다.

살아가는 것이 워낙 힘겹고 고단하던 시절이라 비극을 보는 경험은 자신의 가슴 속에 쌓인 한과 슬픔을 털어내는 여과와 조절의 시간이었습니다. '목포의 눈물'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로 기억됩니다. 흑백으로 만들어진 이 비극 테마 영화의 대부분에서 단골 배역을 도맡았던 한 배우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전옥(全玉)입니다.

영화배우 전옥은 1911년 함흥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전덕례(全德禮)이지요. 함흥 영생중학교 2학년 때 가세가 기울자 집에서 그녀를 시집보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배우가 되고 싶어 극단을 기웃거리던 그는 부모를 설득해 오빠 전두옥과 함께 서울로 내려갔습니다.

전옥은 복혜숙과 석금성이 스타로 있던 토월회 문을 두드려 그곳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배우의 꿈을 키웠습니다. 당시 16세의 전옥은 사슴 같은 눈에 콧날이 오뚝하여 이목구비가 뚜렷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나이는 어렸지만 토월회 무대에 섰고 '낙원을 찾는 무리들'(황운 연출'1927)에서 주연을 맡은 경험도 있었습니다.

전옥은 곧 신일선을 대신해 나운규 프로덕션의 대표 여배우가 되었고, 연이어 '옥녀'(1928), '사랑을 찾아서'(1928)에서 주연을 맡으며 스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전옥은 토월회 무대에서 착실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이후 극단이 해산하게 되면서 영화 일을 하고 있는 오빠를 따라 무대를 떠나 영화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맨 처음에는 나운규와의 인연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28년 17세의 전옥은 오빠의 전문학교 시절 친구이자 가수, 배우로 활동하고 있던 강홍식과 결혼하게 됩니다.

그녀는 남편 강홍식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에서 노래를 생방송했고 방송극에도 출연했습니다. 1929년에는 다시 문을 연 토월회의 무대에 섰으나 이내 토월회가 문을 닫자 지두환이 세운 조선연극사의 무대에 섰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게 만드는 독백으로 유명했으며 비극의 여인 역을 잘 해 '비극의 여왕' '눈물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1930년대 전옥은 강홍식과 함께 많은 음반을 발표했습니다. 이때 발매된 그녀의 음반은 강홍식과 함께 발표한 여러 노래들과 '항구의 일야'로 대표되는, 자신이 출연한 인정비극을 레코드에 담은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중 1934년 강홍식이 발표한 '처녀총각'은 10만 장이라는 엄청난 양이 팔렸습니다. 큰돈을 번 강홍식은 일본 여자와 바람이 나서 가정을 떠났고 해방 후 월북했습니다.

그녀는 라미라 가극단에서 나운규의 '아리랑'을 각색한 '아리랑'(1943)을 비롯해 많은 가극을 공연했습니다. 가극에 출연하면서 그녀는 다시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습니다. 1940년대 일제에 의해 철저히 통제된 영화계는 친일영화만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방 후 전옥은 전국순회공연을 하던 남해위문대를 백조가극단으로 개칭하여 악극을 공연했습니다. 백조가극단의 공연은 전쟁 중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이즈음 전옥은 극단의 살림을 맡던 일본 유학파 출신 최일과 재혼했습니다. 1950년대 중반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전옥은 다시 영화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자신이 출연한 인정비극 '항구의 일야'(1957), '눈 나리는 밤'(1958), '목포의 눈물'(1958) 등을 영화로 만듭니다. 60년대 이후 전옥은 무대와 다른 모습으로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1969년 10월 전옥은 고혈압과 뇌혈전 폐쇄증으로 58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자식들은 남과 북의 영화계를 대표하는 스타가 되었습니다. 영화배우 최민수의 모친인 배우 강효실과 북한의 대표적인 인민배우 강효선이 그의 딸입니다.

이동순(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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