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슬퍼도 웃고 아파도 웃고 화가 나도 웃는 사람이 늘고 있다. '해도 너무~한' 고객들, 습관적으로 화를 내는 직장상사와 동료, 매일 투덜대는 아내와 늘 얼굴을 맞대고 살다 보면 저절로 분노 게이지가 상승한다. 그렇지만, 화를 낼 수도 없다. 우리 사회가 강요받은 웃음. 사라지지 않는 미소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미소란 자신의 뜻대로 자연스레 나올 때 아름다운 법. 그러나 이들의 웃음은 그렇지 못하다. 억지로 이들을 웃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억지웃음이 우리 사회 곳곳으로 확산되고 있다. 백화점'은행'병원'레스토랑을 비롯해 거의 모든 계산대와 공공기관 창구에서 오늘도'최선을 다해 노력한'웃음 꽃이 피고 있다.
◆웃으면 행복하다?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습니까. 하하하."
영업직 10년 차인 김성수(43) 씨는 회사에서 스마일 맨으로 통한다. 거래처 사람을 만날 때는 물론이고 동료들과 얘기를 나누거나 업무 보고를 할 때도 항상 웃는다. 그런 그가 최근 친구의 부친상에 갔다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다. 조문을 하러 갔다 친구를 따뜻한 말로 위로했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던 것. 김 씨의 얼굴에 핀 웃음꽃을 보고 친구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그 후 그 친구와는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아침부터 스마일, 스마일 하다 보니 웃는 게 습관이 되었어요. 친구의 손을 맞잡고 위로하는데 얼굴은 웃고 있더라고요. 상가에서도 웃다니 나도 내 모습에 많이 놀랐어요."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김 씨는 곧바로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그 결과'스마일 마스크 증후군'으로 판명났다. 김 씨는 몇 년 동안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웃음 짓느라 최근에는 두통과 소화불량까지 생겼다고 했다.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이란 무엇일까?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그 뒤에는 오히려 더 우울해지는 증상이다.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해 생기는 경우가 많다. 복잡한 인간관계, 경쟁, 과도한 업무 등 원인도 증상도 다양하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에 따르면 최근 이 같은 환자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김양태 계명대 동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스마일 마스크 증후군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늘고 있다"며"과거 사회적으로 억압된 여성들에게 나타나던 우울증의 일종인 이 증후군이 최근 남성에게도 나타나고 심지어 청소년들에게 나타나는 등 유형이 다양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기본적으로 여성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증상이다. 그러나 최근 억지 웃음을 강요당하는 남성들이 늘다보니 병원을 찾는 남성 환자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정신적 위축감으로 인해 의욕이 없는 생활을 하다가 억울한 감정 등을 제대로 발산하지 못하다 결국, 정신적'신체적 우울감 등을 호소하고 있다"고 했다. 또"이 증후군은 쉽게 드러나지 않아 사태가 심각해지고 난 뒤에야 알아차리게 된다. 스스로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재미가 없고 일의 능률이 떨어지는 증세를 보일 수 있다"고 했다. 힘들고 재미없고 짜증 나는 일이 생겨도 이를 터놓고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다만, 술을 마시고 푸념하는 정도이다. 그래서 증상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병이 상당히 진행된 후에야 병원을 찾는다는 설명이다. 청소년들의 경우 방치하면 학교 폭력으로도 발전할 수 있다.
◆웃음 강요하는 사회
판매나 서비스업 종사자가 늘어나고 고객만족이 기업 생존의 화두로 등장하면서 감정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늘고 있다. 대구의 한 백화점에서 안내를 맡고 있는 이미희(가명) 씨의 말."아무리 손님이 짜증 나는 말을 하더라도 웃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회사를 그만둘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이 씨는"어린 손님이 반말을 해도 참아야 하며 피곤하고 짜증나더라도 손님에겐 늘 미소로 답해야 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웃음과 친절이 곧 매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안방극장은 물론 영화'출판계에서도'억지웃음'이 화두가 되고 있다. 최근 개봉된 영화'웃는 남자'는'웃음을 강요하는'우리 사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평생 억지웃음을 짓고 살아야 하는 남자 그윈플렌이 주인공이다. 칼로 만들어낸 미소를 지닌 주인공 그윈플렌은 웃으며 사람들을 웃겼다. 그러나 그는 웃지 않는다. 얼굴이 웃었지 그의 생각은 웃지 않는 모습이 우리들의 자화상을 닮았다. TV 프로그램'개그콘서트'의 한 코너에서는'정 여사'의 무리해도 너무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는 매장 직원이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안쓰러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직장의 신'에서는 정규직 사원으로 나온 장규식 팀장이 계약직인'미스 김'에게 억지웃음을 강요하기도 했다.
출판계에서도 웃음과 관련된 서적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 2월에는 이동통신사 직원들이 에피소드, 극복 수기, 고객들을 웃음으로 대하는 요령 등을 묶어'감성으로 감동을 말하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몇 년 전 인기를 끌었던 번역서 '미소' 등을 다시 찾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도건우 2040미래연구소 소장은"인사고과, 회사방침, 고용불안, 고객불만, 그리고 쥐꼬리만한 월급이 감정노동자들을 억지로 웃게 만들고 있다. 이들의 웃음은 강요받은 웃음. 사라지면 큰일나는 미소다. 그러나 이들은'또 하나의 가족' 앞에서 종일 웃고 서 있기 위해 자신의 진짜 가족들 앞에서는 늘상 찌푸린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또"감정노동자가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 현실이다. 감정노동자의 스트레스 요인과 영향에 대한 실태조사가 이뤄져야 하며 조직적인 차원에서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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