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공원 성당못 둘레를 산책하다 보면 군데군데 노인들이 바둑을 두는 구석진 자리에 러시아의 대문호 푸슈킨의 시비가 하나 있다. 나무에 가려져 있어 누구 하나 알아보는 사람도 없지만, 베이비붐 세대에 태어나 숱한 경쟁을 겪으면서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낙오된 우리 세대들은 이 시 한 구절, 한 구절을 위안 삼으며 재기를 꿈꾸곤 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 우울한 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려니. 마음은 언제나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푸슈킨은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을 확립한 사람이다. 혁명적 사상가들과 교류했고, 농노제 타파 등 타협하지 않는 정치적 신념과 시대를 거부하는 문학이 화근이 되어 남부 러시아에 유배되기도 했다. 불우한 유배생활은 시인에게 높은 사상적'예술적 성장을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더욱 슬픈 것은 젊고 매혹적인 아내 나탈랴가 네덜란드 망명 귀족 단테스와 바람이 나는 바람에 그는 객기로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했고, 두 사람이 동시에 방아쇠를 당기기로 했다. 그러나 아내는 먼저 총알을 맞고 피투성이가 된 그에게로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정부(情夫)인 단테스에게 뛰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푸슈킨은 쓸쓸히 죽어갔다.
사랑하는 아내가 자기를 버리고 다른 남자 품에 안긴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다. 푸슈킨이 러시아인들에게 대문호로 추앙받지만 그의 삶은 결코 평탄치만은 않은 것 같다. 인류가 이 땅에 정착한 이후 '정보'와'사랑'은 끊임없이 변하는 세대에도 불변으로 지속되어 왔다. '정보'는 국가와 자신을 방어하고, 선제공격을 위한 수단으로 필요한 것이다. '사랑'은 종족 번식과 개인의 삶을 윤기나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유감스럽게도 푸슈킨은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하다 끝내 목숨까지 잃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하여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신청하여 죽음을 맞이한 푸슈킨을 보면서 '사랑' 그것이 얼마나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인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그가 죽어가면서 다른 남자의 품으로 달려가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비통하고 쓸쓸했을까? 젊은 날에 이 남자의 죽음이 한동안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38세에 죽은 그는 러시아 문학의 모든 유파가 '푸슈킨에게서 비롯되었다' 할 정도로 대문호였지만, 잃어버린 사랑으로 인하여 불쌍하고 초라한 삶을 살아간 사람이다. 대구 성당못 둘레에 있는 그의 시비를 보니, 씁쓸하다.
최규목<시인 gm3419@daegu.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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