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전 7시 30분 대구시교육청 앞마당. 희끗희끗한 머리의 어르신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이른 시간 운동을 하는 어르신들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는 풍경. 하지만, 이날 모인 어르신들은 빨간색, 파란색, 오렌지색 등 함께 맞춘 옷을 입고 가방을 둘러메고 있었다. 어르신들은 초등학교 성인문해 과정을 운영하는 대구내일학교 학생들. 1박 2일 일정으로 수학여행을 떠나기 위해 집합 장소인 시교육청을 찾았다. 날씨는 다소 쌀쌀했지만, 어르신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번졌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어르신들께 오전 9시까지 오시라고 안내했는데 여행에 대한 기대가 커서인지 7시 무렵부터 모이시기 시작했다"고 귀띔했다.
대구내일학교 졸업반인 어르신들의 '뒤늦은' 수학여행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작년 9월 입학해 한글을 익히는 등 초등학교 과정 공부를 하고 있는 어르신들의 평균 나이는 66세. 애초 정원은 130명이었지만 돌아가시거나 취업, 병환 등을 이유로 17명이 그만뒀고 현재 재학생은 113명이다. 오는 9월 졸업을 앞두고 난생처음 '수학여행'을 경험하게 됐다. 개인 사정으로 빠진 어르신을 제외하면 모두 83명이 여행길에 나섰다.
부산 아쿠아리움에 들렀다 대구교육해양수련원(경북 포항 소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경주 불국사, 천마총, 반월성 등을 돌아보는 것이 이번 수학여행 일정. 자체 설문조사 후 수학여행 추진 여부와 행선지를 정했다. 어르신들은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는 의견을 모으고 이 같은 일정을 짰다.
남들보다 수십 년 늦은 여행이어선지 어르신들의 감흥은 더했다. 혹시나 집합 장소를 찾지 못할까 전날 이미 시교육청 답사(?)를 온 어르신도 있었고, 이날 모일 땐 인솔 선생님 도시락까지 준비했다며 커다란 짐보따리를 두 개씩 든 어르신들도 눈에 띄었다. 장순자(69) 할머니는 "우리가 수학여행을 간다니 실감이 잘 안 난다"며 "덤으로 인생을 사는 것처럼 즐겁고 행복하다"고 했다.
서정순(67) 할머니는 돌발 행동으로 어르신들을 배웅하던 우동기 대구시교육감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인사를 건네던 우 교육감에게 큰절을 한 번 해야겠다며 앞으로 나선 것. 우 교육감이 수차례 만류했으나 서 할머니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수학여행 기회를 마련해줘 고맙다"며 큰절을 했다. 우 교육감도 엉겁결에 무릎을 꿇고 맞절을 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웃음보를 터뜨렸다.
시교육청은 어르신들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버스 임차료와 각종 시설 입장료, 수련원 숙식비를 지원했다. 우동기 교육감은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많아 한꺼번에 많은 곳을 둘러보긴 어렵겠지만, 기억에 남는 수학여행이 될 것"이라고 했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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