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버스로 그리는 경북 스케치] <20>계곡따라 바다로 흘러가는 울진

화전민의 아픈 역사·금강송 군락의 설화…골 따라 흘러 역사의 물길 되다

버스 창밖으로 펼쳐지는 골 깊은 계곡을 보며 까무룩 잠이 들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떠보니 창 밖으로 푸른 바다가 스쳐 달린다.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기댔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둘러보니 다시 깊은 산속이다. 이처럼 울진은 깊은 골짜기와 푸른 동해바다를 한번에 맛볼 수 있다. 물길이 산의 틈에서 흘러나와 바다의 품에 안기기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따라갈 수 있는 점도 매력있다.

◆가슴이 트이는 불영사계곡

오전 7시쯤 울진 시외버스정류장에서 광비행 버스를 탔다. 불영사까지는 25분가량 걸린다. 울진읍내를 빠져나온 버스는 봉화로 가는 36번 국도를 달린다. 도로는 왕피천과 합류하는 광천을 따라 산허리를 휘감으며 돌아나간다.

15분쯤 달렸을까. 첩첩이 서 있는 산들 틈을 따라 거대한 계곡이 펼쳐진다. 불영사계곡이다. 계곡은 근남면 행곡리에서 서면 하원리까지 15㎞나 이어진다. 맑은 물이 흐르는 절벽 틈마다 뿌리내린 아름드리 적송들이 하늘로 뻗어 있다. 그야말로 절경이다.

숨 가쁘게 오르던 버스가 천축산 불영사 입구에서 멈춰 섰다. 주차장을 지나 일주문에서 불영사 입구까지 1㎞를 걸어야 한다. 흙길을 따라 길 양옆으로 전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졌다. 석가탄신일을 앞둔 때문인지 연등을 줄지어 달아놓았다.

불영사는 651년(진덕여왕 5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라 한다. 사찰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건 연못 '불영지'다. 절 주변은 천축산의 봉우리들이 빙 둘러서 있다. 절이 꽃잎에 둘러싸인 꽃술이라면 연못은 꽃 꿀인 셈. 대웅전과 응진전 마당에는 이른 아침부터 연등을 다는 인부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불영사에서 차로 30여 분을 더 달리면 화전민마을이었던 전곡리 전내마을과 국내 최초의 민자 역사인 양원역이 있다. 하지만 버스로는 접근이 쉽지 않다. 전내마을에서 버스가 서는 광회1리까지 8㎞나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엄기표 울진군청 홍보팀장이 "전내마을에 사는 향토사학자인 주보원(78) 씨를 만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주 씨는 그동안 화전민들이 모여 살던 전곡리와 소광리 금강송 군락지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내 복원해왔다고 했다.

◆아스라이 남은 화전민의 기억

전곡리 전내마을로 들어가는 찻길은 광회2리에서 넘어오는 좁은 임도가 전부다. 전내마을은 산 너머 하천을 끼고 있는 평지에 10여 가구가 흩어져 사는 오지마을이다. 주보원 씨가 이곳에 터를 잡은 건 20여 년 전 일이다. 1970년대 전곡리에서 장석 광산을 운영했던 그는 마을을 떠났다가 예순 살이 되던 해에 되돌아왔다.

돌아온 그는 향토사학자가 됐다. 백병산의 사계를 사진으로 담고, 희귀한 들꽃들도 찾아냈다. 또 화전민들의 주거와 생활상, 문화, 유물 등을 조사해 기록하고 구전돼 오던 설화들도 발굴했다. 인조반정 당시 이곳에 유배됐던 영천 이씨 수찬공파의 묘소를 찾아내기도 했다. "전곡리에도 예전에는 골짜기마다 화전민 마을이 있었어요. 1950년대만 해도 7개 골짜기에 88가구나 살았죠." 화전민들은 1960년대 중반부터 타의에 의해 산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화전민들이 삼베를 얻기 위해 경작하던 대마를 정부에서 단속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1968년 울진 삼척 무장공비침투사건이 있은 후부터 정부는 화전민들의 주거지가 간첩 활동의 근거지가 된다며 화전민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전내마을에는 '발구'의 흔적이 남아있다. 원래 말이나 소의 목에 얹어 매고 물건을 운반할 때 사용하던 물건이지만 전내마을에서는 원목을 싣고 끌어가는 데 쓰였다. 발구 밑에 나무토막을 적당한 간격으로 깔아 침목으로 이용했다. 금강송을 베어 발구로 옮긴 뒤 하천에 물이 불면 뗏목을 이용해 나르는 식이었다. 주 씨는 "화전민들은 산불을 내던 존재가 아니다"고 했다. "화전민은 빽빽한 산림의 큰 나무를 없애 키 작은 식물을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화전민이 사라진 이후 울창한 숲 때문에 키 낮은 야생화나 산나물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세상에서 가장 작은 기차역

전내마을에서 가까운 원곡마을에는 간이역인 양원역이 있다. 승부역과 분천역 사이에 있는 간이역으로 1988년에 들어섰다.

전곡리가 외부로 통하는 제대로 된 교통로는 철도가 유일하다. 경사가 심한 임도는 겨울철 눈이 많이 오면 막히거나 빙판길로 변하기 일쑤다. 날씨가 궂으면 며칠간 외부와 통행이 단절되는 일도 잦다.

원곡마을을 지나 낙동강 협곡을 건너면 양원역을 만난다. 간이역이지만 하루 4번 무궁화호가 서고, 백두대간 협곡 열차도 하루 3회 지난다. 주민들은 양원역에서 열차를 타고 분천역 인근의 봉화 춘양장이나 철암역 인근인 태백 철암장에 가서 생필품을 구입한다.

양원역은 영동선이 개통한 지 33년 만에야 문을 열었다. 그전까지 열차를 타려면 주민들은 7㎞나 떨어진 승부역까지 가야 했다. 주민들은 마을 앞을 달리는 열차를 빤히 쳐다보며 철로 옆을 걸었다. 가장 큰 위험 구간은 열차를 만나면 피할 곳이 없는 교량이나 터널이었다. 승부역까지 터널과 교량은 모두 6곳. 이 구간에서 미처 피하지 못해 숨진 주민이 7명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분천역을 출발한 열차가 원곡리를 지날 때면 차창 밖으로 장 보따리를 집어던졌다. 무거운 짐을 들고 멀고 위험한 철로를 걸어올 수 없었기 때문. 애써 둘둘 싸도 보따리 안의 물건들은 깨지기 일쑤였다. 더구나 밀가루 안에 묻어둔 농약병이 깨지는 날엔 그야말로 '절단'이었다. 주민들의 오랜 청원 끝에 1988년 4월 간이역 허가를 받았고, 주민들은 직접 제 손으로 승강장과 대합실, 화장실을 만들고 이정표를 세웠다. 국내 최초의 민자 역사이자 가장 작은 역이 탄생한 배경이다.

◆세계의 다리를 건너 망양정까지

오전 8시 35분 불영사 입구에서 덕구온천행 버스에 올랐다. 해안도로와 7번 국도를 따라 죽변항과 북면 부구리를 거쳐 덕구온천스파월드까지 1시간 20분을 타고 가는 긴 노선이다. 노선이 긴 만큼 하루에 한 번밖에 운행하지 않는다.

울진에는 덕구온천과 백암온천 등 수백 년을 이어온 온천단지가 2곳이나 있다. 고려 말에 발견된 덕구온천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자연용출온천이다. 따로 지하 관정을 뚫지 않아도 연중 42.4℃의 온천수가 뿜어져 나온다. 덕구온천은 덕구계곡 상류의 원탕에서 용출되는 하루 2천여t의 원수를 4㎞ 파이프를 통해 취수한다.

덕구온천스파월드 인근 벽산덕구온천콘도에서 원탕 사이에는 '덕구계곡 테마등산로'가 개설돼 있다. 응봉산 자락을 걷는 왕복 8㎞ 구간으로 비교적 평탄한 길을 계곡을 따라 걷는 코스다. 덕구계곡에는 한국의 서강대교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프랑스의 노르망디교, 호주 시드니 하버브릿지, 경주 불국사의 청운교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량 13개를 축소한 형태의 다리가 걸려 있다. 2003년 태풍 매미로 기존의 다리들이 모두 유실되면서 명물 교량의 축소판으로 재탄생했다. 사실 세계의 유명 교량의 흉내는 냈는데 좀 어설프다.

물소리 경쾌한 계곡을 따라 초록빛 잎을 틔운 숲이 그늘을 드리운다. 숲과 계곡을 따라 길게 늘어선 철제 파이프가 거슬리지만, 계곡의 아름다움을 덮을 정도는 아니다. 금문교를 통과해 다리 서너 곳을 지나면 용소폭포와 마당소에 도착한다. 물길은 오랜 세월 단단한 화강암에 층층이 움푹한 소를 깎아냈다. 폭포 위쪽에 설치된 다리 위에 서면 굽이쳐 내려가는 폭포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원탕까지 1㎞가량을 앞둔 지점에 효자샘이 있다. 맑고 시원한 물이 마른 목구멍을 달게 넘어간다. 원탕에 도착하면 따뜻한 온천수를 쉴 새 없이 내뿜는 분수를 만난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니 2시간 30분이 걸렸다. 오후 1시 10분 덕구를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죽변항을 거쳐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까지 40여 분을 달렸다. 죽변항 가까운 죽변시외버스정류장은 해변과 맞닿아 있는 가건물이다. 아마 국내에서 가장 바다와 가까운 시외버스정류장이지 싶다. 전국에 있는 국보'보물급 비석들을 원형 그대로 재현해 전시한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을 거쳐 울진군청까지 온 뒤 망양정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망양정은 주차장에서 횟집 옆으로 난 소나무길을 따라 250여m를 오르면 된다. 망양정에서는 불영계곡의 물길이 왕피천과 합쳐져 동해바다로 흘러드는 장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글'사진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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