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의 전통이 강했던 지역이다. 옛 선비들의 선우후락(先憂後樂'근심할 일은 남보다 먼저 근심하고 즐길 일은 남보다 나중에 즐긴다) 정신 덕분이다.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으로 유명한 경주 교동 최부잣집, 안동 임청각 99칸 종가를 비롯한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상용 선생, 흉년이 들어 궁핍해진 마을 사람들을 위해 참나무를 심고 도토리죽을 끓였던 영양의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 등이 대표적이다.
대구 수성구 수성동4가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는 이재수(51) 원장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야기를 꺼냈더니 손사래만 쳤다. "아이고, 제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요…."
◆20여 년 봉사활동…'아너 소사이어티' 회원
그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 회원이다. 사회지도층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자는 차원에서 2007년 만든 개인 고액 기부자들의 모임이다. 1억원 이상 기부 또는 약정할 경우 회원 자격을 얻는다. 유명 연예인인 현영, 수애 등도 가입했다.
이 모임에는 현재 대구 9명을 포함, 전국에 285명의 회원이 있다. 대구의 경우 경제'인구 규모를 생각하면 아쉽게도 많지 않은 숫자다.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관계자는 "다음 주 10번째 회원 가입을 맞아 클럽을 구성하고 홍보'봉사활동을 체계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이 원장은 지난해 12월, 대구 '아너 소사이어티'에 7번째 회원으로 가입했다. 1억원도 한꺼번에 냈다. 기부를 결심한 배경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기부할 생각이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계획해왔던 일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대구에는 고액 기부자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탁했습니다. 대구의 명예가 걸린 문제이기도 하고, 기부문화가 확산되길 바라는 마음이었죠. 물론 장학금도 언젠가 전달해야지요." 이 원장은 지역 복지시설에 고정적으로 후원금을 내고 있지만 밝히지 말아 달라고 했다.
한약재 냄새가 짙게 밴 이 원장의 진료실 책장에서는 각종 기관'단체로부터 받은 감사패들이 눈에 띄었다. 가장 오래된 감사패는 1989년 경상북도 아마추어레슬링협회에서 전달한 것이었다. 봉사활동이 20년을 훌쩍 넘었다는 뜻이다. 그는 매주 목요일 오후에 달서구 월성종합사회복지관에서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를 하고 있다. 벌써 17년째다.
"학생 시절에 불교학생회인 '법련회'에 참여해 무의촌 진료를 다녔던 게 봉사의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1988년 개업한 뒤에는 우연한 기회에 부상이 잦은 운동선수들의 치료를 도와주게 됐고요. 이후에는 또 다른 인연을 따라 대구 시내 복지관 몇 곳에 나가게 됐습니다. 제게 남을 도울 수 있는 기술과 건강이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할 일입니다."
두 차례나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을 받을 정도로 활발한 봉사활동을 펴왔지만 그는 "아직까지 봉사라고 할 만한 게 없다"고 계속 겸손해했다. 괜한 오해를 사기 싫다는 속내도 내비쳤다. 그런 그에게 "원래 봉사에 대한 사명감이 있었느냐"고 돌직구 질문을 던졌다.
"1982년 진학에 대한 고심 끝에 대구한의대를 선택했을 때만 해도 솔직히 돈 많이 벌겠다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6남매인 저희 집 형편이 넉넉한 편은 아니어서 저도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야 할 정도였거든요. 그런데 봉사하면서 살다 보니 어느 순간 삶의 목표가 바뀌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난한 살림살이 속에서도 당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들에게 늘 베풀며 사셨던 부모님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물처럼 사는 것"
평범한 소시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현금 1억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번쩍번쩍 빛나는 고급 수입 승용차를 살 수도 있고, 시골에 논밭을 사서 노후를 대비할 수도 있다. 물론 무주택 서민들에게는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종잣돈일 터.
내친김에 속 보이는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을까 하는 군색(窘塞)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우문현답(愚問賢答), 아니 도를 깨친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저희 집사람이 재테크에 영 소질이 없는 것 같습니다. 높은 사람들은 인사청문회다 뭐다 해서 보니까 전부 자기 몰래 부인이 땅을 샀네, 아파트 분양권을 샀네 하던데 말이죠. 허허허. 저나 집사람이나 '내 것'에 대한 욕심은 별로 없습니다. 덕분에 저희는 땅 한 평 없이 아직 전셋집에 삽니다. 건물 관리하는 것도 스트레스일 것 같아 병원도 19년째 세들어 있어요."
그 흔한 골프장 회원권 하나 없이, 7년 된 국산 승용차를 몰지만 노후 대비는 조금씩 하고 있다며 오히려 기자를 위로(?)하는 이 원장 앞에서 속절없이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한의학 박사답게 건강 관리, 특히 정신 건강에 신경 써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의 병원은 대구시가 선정한 '의료관광 선도 의료기관' 31곳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화병 때문에 진료받으러 오시는 분이 예전보다 많이 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살던 동네가 재개발돼서 보상을 받았는데 옆집보다 보상액이 적은 걸 알고 앓아누우신 분도 있었고요. 성취감을 못 느끼면 울화(鬱火)가 생기고 결국 병으로 이어지는 것이죠. 한방에서는 감정의 부조화가 병의 근원이라고 봅니다. 요즘 말로는 스트레스가 쌓여서 '멘붕'이 오는 것이죠."
그래서일까? 그에게 좋아하는 경구(警句) 하나를 가르쳐달라고 했더니 '고즉락'(苦卽樂)과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일러줬다. 괴로움이 곧 즐거움이고,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물처럼 사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인생은 괴로움의 바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가치관에 따라서 괴로움은 즐거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게는 치료를 통해 상태가 호전된 환자들이 보내주는 따뜻한 감사 인사 한마디가 세상 사는 제일 큰 보람입니다."
겨울이면 크리스마스 장식을 달고, 봄철이면 연등(燃燈)을 단다는 그의 진료실 조화 나무에는 환자들이 손수 만들어서 보내준 연등이 알록달록 빛나고 있었다.
◇ 자비 털어 일본서 강탈 한의서 추적…"반환운동 벌여야죠"
◆민족 전통의학 '동의학' 우수성 알리는 데도 앞장
이 원장이 봉사 활동과 함께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동의학'(東醫學)의 우수성을 알리는 일이다. 1995년부터 혼자 힘으로 '한방 평론'이란 월간지를 5년 동안 펴냈으며, 1996년에는 한국 한의학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수록한 540여 쪽 분량의 '한국한의학사'라는 저서를 내놓았다. 우리 한의학의 개념, 역사와 함께 한의학 관련 인물 1천550여 명을 소개한 책으로 그가 1994년부터 추진했던 '해외 한의서 반환운동'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약탈당한 우리 한의서가 일본에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신문 기사를 우연히 본 것이 계기였습니다. 당시 한의사와 약사 간의 '한약 분쟁'을 통해 쌓인 한의학계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켜야겠다는 뜻도 있었고요. 사재를 털어 일본 왕실의 궁내청과 도쿄, 나고야, 오사카 등지의 도서관을 돌며 우리 한의서 실태조사를 했고, 국내에선 전국을 돌면서 서명운동을 벌였죠."
하지만 일본에서 우리 한의서를 되돌려 받지는 못했다. 귀한 책들이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 정도가 성과였다. 그가 두고두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대목이다.
"요즘은 해외 문화재 반환운동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정부도, 국회의원들도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정치권에 탄원서를 여러 번 냈는데 반응이 없더라고요. 국가 간의 일이라 물론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우리 문화유산을 되돌려 받는 일은 소홀히 해서 안됩니다."
◇이재수 원장은=그는 196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동인초교'중앙중학교'대건고를 거쳐 대구한의대를 졸업했다. 1995년 같은 대학에서 석사, 2006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한한의사협회 대구 수성구회장을 2011년까지 8년 동안 맡은 것을 비롯해 왕성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 수성구 청소년지도협의회 위원, 대구경찰청 경찰발전위원회 위원, 수성4가 희망나눔위원회 부회장, 수성구자원봉사센터 고문 등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의 소망에 대해서도 "체력이 허락하는 한 다른 사람들을 도우면서 아픔을 어루만져 주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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