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군 구산항은 평화로웠다. 동네 입구의 짙푸른 월송은 시원했고 바다 앞 유채꽃은 질 무렵이었으며 동네 노인들은 대게 어망 뒷정리에 한창이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사람 좋게 웃으며 나타난 임창순(51'울진군 기성면 구산리) 씨. 그가 이곳으로 온 것은 올해 2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이었지만 조용한 이곳의 풍경이 좋아서, 또한 동해의 이어도라 불리는 앞바다의 왕돌잠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아내를 설득하는 데 3년이 걸렸다.
그는 구미에서 15년 동안 낚시점을 했다. 그 이전에는 구미에 있는 큰 규모의 회사에 다녔다. 낚시점을 위해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났듯, 바다를 찾아 미련 없이 낚시점을 접었다고 했다.
동해 바다에서 마지막 꿈을 펼쳐보고 싶다는 임 씨. 그는 왕돌잠에서 낚시로 1m 넘는 고기를 잡을 요량이라고 했고 400m 바닷속 깊은 물고기를 낚고 싶다고 했다. 말수가 적었지만 바다 이야기가 나오자 급해졌고 신명이 났다. 펄떡거리는 그의 '동해 도전기'는 바다처럼 싱싱했다.
-연고도 없는 이곳에 온 이유는.
"구산 앞바다의 왕돌잠 때문이다. 그곳에는 1m가 넘는 고기들이 살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문어를 잡을 뿐 고기를 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 곳이다. 바위가 많아 고기잡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왕돌잠에 낚싯배를 띄우고 꾼들에게 대어의 손맛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아무도 해보지 않은 깊은 바다의 큰 고기를 낚으러 왔다."
-왕돌잠이 무엇인가.
"동해의 이어도라고 불리는 곳이다. 울진군 후포면 앞바다에서 약 20㎞ 나가면 수심 200m인 곳에 사방 80리의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를 이르는 말이다. 어마어마한 규모다. 여기를 공략하러 왔다."
-도전적이다.
"낚싯대를 잡으면 아무도 해보지 않은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어진다. 루어낚시도 그래서 도입했다. 이젠 380m까지 깊은 곳에 있는 고기를 낚시로 잡을 생각이다. 국내서는 200m 정도면 깊은 곳이라고 여긴다. 지금은 장비가 없는 상태지만 이미 개발된 장비를 보완해서 도전할 계획이다. 더 큰 꿈도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이 마을은 조선시대 수토사들이 독도와 울릉도를 지키러 가기 위해 적당한 바람을 기다리는 대풍헌이 있는 곳이다. 이들이 갔던 것처럼 내 배를 타고 독도까지 가서 바다낚시를 하는 것이 꿈이다. 독도 앞바다에서 낚시를 하며 독도가 우리 땅임을 분명히 하고 싶다. 5t 정도의 배로 독도까지 가려면 6, 7시간 걸린다. 이미 여러 명이 신청해왔다."
-어떻게 귀어(歸漁)를 생각하게 되었는가.
"구미에서 1998년 봄부터 올해 2월까지 낚시점을 했다. 생각해보니 어릴 때부터 워낙 낚시를 좋아했다. 이러저러한 낚시와의 인연이 귀어를 결심한 동기인 것 같다. 직접 낚싯배를 몰고 나가 낚시꾼들과 동해 바다서 큰 꿈을 잡고 싶었다."
-낚시점을 접은 이유는.
"2009년 낚시점에 도둑이 들었다. 돈 되는 것을 몽땅 털렸다. 이때 낚시점을 접고 새로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3년 전부터 장소를 물색하고 각종 지원이나 제도 등을 알아봤다. 영덕어업기술센터를 통해 2억원의 어업지원비와 4천만원의 주택 구입비용을 저리로 지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100시간 이상 공부를 해야 했다. 지난해 말부터 인터넷을 통해 열심히 공부하면서 확신을 가졌다. 가장 어려운 것은 아내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부인을 어떻게 설득했나.
"아내에게 울진은 아주 낯선 곳이다. 또 바다를 의지해 사는 것은 처음이라 자신이 없었던 것 같았다. 물론 내가 확신이 없었던 점이 망설인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낚시점 하던 지인이 서해 쪽에서 성공한 것을 보면서 확신이 섰고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3년이 걸렸다. 아내는 '하고 싶은 일이라면 해보고 살아야지'라며 마음을 열어주었다. 고마울 뿐이다."
-계획대로 잘 되어가고 있나.
"동네분들과 짧은 시간에 아주 친하게 됐다. 모두들 아들처럼 좋아한다. 동네분들이 부르면 모든 일을 제치고 뛰어간다. 고추도 심고 못도 박고 가위도 갈아 드린다. 문제는 아직 고깃배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개인택시처럼 어업권을 사야만 배를 구입할 수 있는데 어업권도 아직 구하지 못했다. 틈틈이 어업권과 배를 구하러 다니고 있다. 집 지을 터는 마련해두었다."(지금은 월세 20만원인 집에 살고 있다.)
-바다에 오니 좋은 점은.
"돈이 들지 않는다. 이 동네는 돌미역이 지천이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근처 후포나 평해 5일장에 가서 사기 때문에 낭비할 일이 없다. 무엇보다도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제일 좋다. 운전을 해도 시속 40㎞ 이상 달리지 않는다. 저절로 그렇게 되더라. 모든 게 자연의 시간에 맞춰 움직인다."
-자연의 시간에 맞춘다는 의미는.
"낚시점 할 때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다. 여기 오고부터는 저녁 8시면 잔다. 온 동네가 깜깜하기 때문이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난다. 바닷가를 한 바퀴 돌고 나면 6시쯤 된다. 이때쯤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일어나 일한다. 그날 바람을 보고 일거리를 정한다. 샛바람이 불면 바닷가 쪽으로 떠밀려오는 미역 줍는 일을 한다. 바닷바람에 따라 할 일이 달라지는 것이 재미있지 않나."
-낚시할 때 원칙이 있다는데.
"필요한 양 이상의 고기는 모두 방생하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낚시하면서 낚은 인생의 교훈이다. 욕심을 버리면 더 크고 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 2000년 합천댐에서 62㎝ 쏘가리를 낚았다. 이 고기를 청평중부내수면연구소에 기증을 했더니 거기서 쏘가리의 중요한 습성을 알려줬다. 그 이후로 쏘가리 낚시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게 됐다."
-바다에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아직 바다는 은퇴자들에게는 불모지나 다름없다. 낚시에 취미가 있거나 고기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아주 살기 좋은 곳이다. 먹을 것이 지천으로 널려 있고 동네분과 잘 사귀면 모든 게 즐겁다. 자연에 순응하며 산다는 의미를 알게 된다. 바다가 허락한 만큼 잡을 수 있고 생활할 수 있는 것이 이곳 생활이다. 노후의 시계와 딱 맞는 셈이다."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사진: 김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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