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선창'(船艙)의 가수 고운봉(하)

'선창', 식민지 시절 학생과 지식인들의 애창곡

작사자 무적인은 작곡가 이재호의 또 다른 예명입니다. 같은 음반에서 동일한 이름의 반복 사용을 꺼린 경우인데, 이런 사례는 김용환, 김해송, 손목인, 반야월 등의 작품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운봉의 노래에 가사를 주었던 작사가로는 유도순, 이고범(이서구), 무적인, 조경환(고려성), 천아토, 진우촌, 박원, 조명암(이가실), 이성림, 남려성, 고명기 등입니다. 작곡가로는 전기현 선생을 비롯하여 이재호, 손목인, 이봉룡, 김해송, 박시춘, 송희선, 한상기 등입니다.

항상 당대 최고의 가수들을 거느려야만 직성이 풀렸던 오케레코드사 이철 사장은 1940년 가을, 고운봉을 오케로 스카우트했습니다. 그러고는 '홍등일기' '밤차의 실은 몸' '모래성 탄식' '결혼감사장' '할빈서 온 소식' '선창' '백마야 가자' 등을 발표시켰는데, 탁월한 대중 프로모터의 자질을 지녔던 이철 사장의 선택은 정확히 들어맞았습니다.

1941년 여름, 그 무더위 속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힘겹게 발표한 노래 '선창'(조명암 작사'김해송 작곡, 오케 31055)은 공전의 히트곡으로 떠올랐습니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비린내 나는 부둣가엔 이슬 맺힌 백일홍/ 그대와 둘이서 꽃씨를 심던 그날도/ 지금은 어데로 갔나 찬비만 나린다.'

유성기 위에 SP 음반을 올리고 오랜만에 듣는 유행가 '선창'은 험한 세월을 힘겹게 통과해 오느라 서걱거리는 잡음이 절반입니다. 하지만 그 서걱거림 속에서 들려오는 고운봉의 슬픔을 머금은 창법과 쓸쓸한 여운은 가슴 밑바닥에 켜켜이 쌓인 우리들 젊은 날의 미련과 후회를 한 바탕 대책 없이 휘저어 놓고야 맙니다. 지난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꿈과 이상을 가졌었고, 또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과 열정으로 가득 찼던 것입니까? 이제 그 살뜰한 젊음의 추억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요?

식민지 시절, 학생과 지식인층 사이에서 이 노래는 그렇게도 많이 애창이 되었다고 합니다. 노래 가사도 훌륭하고 작곡도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거기다가 가수의 창법 또한 최상의 수준에 이르렀으니 그야말로 작사, 작곡, 노래의 세 박자가 완전히 일치를 이룬 절창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지요. 이런 본보기는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분단 이후 작사자와 작곡가의 월북, 혹은 납북으로 인해 이 작품의 작사, 작곡이 다른 분으로 슬그머니 바뀐 괴기적 사례 중의 하나였습니다.

고운봉은 1942년에 다시 콜럼비아레코드로 소속을 옮깁니다. 이후 '통군정의 노래' '황포강 뱃길' 등을 비롯하여 약 대여섯 곡을 발표하지만 이 가운데는 친일적 성향의 작품들이 더러 포함되기도 했습니다. 광복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고운봉은 특이하게도 10여 년 동안 재즈와 록, 칼립소풍의 미국 대중음악에 심취하여 연습을 하다가 1958년에 돌아옵니다.

1950년대 후반 고운봉은 또 한 곡의 히트곡을 발표하게 되는데 '명동블루스'(이철수 작사'나음파 작곡)가 바로 그것입니다. '명동블루스'는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명동, 그 폐허 위에서 다시 새로운 삶의 의지를 불태워가던 당시 지식인들의 내면 풍경을 실감 나게 다룬 명곡입니다.

1970년대로 접어들어 가수 고운봉은 흘러간 옛 노래를 자신의 스타일로 리바이벌한 음반을 발표하여 가요팬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2000년에는 충남 예산의 덕산온천에 '선창' 노래비가 세워졌는데, 고운봉은 이날 '선창'을 눈물로 열창했습니다.

짙은 우수를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도 깔끔하고 점잖은 창법, 적절한 울림으로 깊은 호소력을 발휘한다는 평을 받았으며, 일생을 통해 약 200여 곡의 작품을 발표했던 가수 고운봉. 그는 2001년 여름에 영영 이승을 하직했습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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