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이의 부음을 듣고 경북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을 때면 가끔 응급실 건너편 소방도로를 걷는다. 그곳에는 젊은 날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몸도 마음도 몹시 지쳐 있을 때였다. 비록 호의적이지 못한 세월에 절망하고 방황했지만, 장밋빛 꿈만은 접지 않았다. 하숙을 하던 그곳은 다른 건물이 들어서 이젠 조그만 골목만 남아 있다. 벌써 22년의 세월이 흘렀는가보다.
전봇대에 '하숙방 이씀'이라는 고풍 넘치는 글씨를 봤을 때, 이미 하숙집 주인이 젊지는 않을 것이라 예감은 했다. 막상 일흔이 넘으신 할머니가 혼자서 꾸려간다는 걸 알고서는 적잖이 놀랐다. 작달막한 키의 할머니는 꽤나 인정스러웠다. 그렇지만 자식들이 외지에 살고 있어 외로움을 많이 탔다. 역시 사귀는 사람이 없어 무료하던 나와 할머니는 고독이라는 동병상련으로 자연스럽게 친해져 갔다. 어느 날, 친정 마을을 한번 다녀오고 싶다고 하시기에 쾌히 모시겠다고 했다.
초여름의 어느 화창한 일요일, 고물 포니 픽업 트럭은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야외로 접어들었다. 할머니가 소녀처럼 즐거워했다. 신록이 짙어진 먼 산으로는 옅은 안개가 드리워져 있었다. 모낸 지 오래지 않은 들판으로는 싱그러운 바람이 빗질을 하고 지나갔다. 차창으로 초여름의 향기가 가득 몰려왔다. 할머니는 근 10년 만의 외출이라고 했다. 비슷한 연세의 올케를 만난 할머니는 잡은 손을 놓을 줄 모르고 반가워했다.
그해 초겨울, 나는 결혼과 함께 하숙집을 떠나게 된다. 그 무렵은 하숙집도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하나 둘 빠져나간 방은 채워지지 않았고, 할머니의 기력도 날로 떨어져 가고 있었다. 막걸리를 한잔 하시면 '다른 사람은 다 가더라도 자네만은 내하고 함께 살제이!'라며 넋두리처럼 늘어놓던 할머니의 바람도 끝나고 말았다. 하숙집을 떠나기 전날,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많이 섭섭해했다. 함께했던 시간, 특히 친정 청통으로의 나들이는 정말 잊지 못할 기억이라고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인사를 갔을 땐,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스스로 길을 떠났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하숙생이 모두 떠나고 때로는 자식같이 친구같이 지내던 나마저 떠나면서, 할머니의 심리적 공황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오래 떨어져 살아 이미 타인이 되어버린 자식에게도 돌아갈 수가 없었다. 세상의 막다른 골목에 홀로 남겨진, 기력이 다한 노인의 선택은 어쩌면 쓸쓸한 황혼길을 스스로 재촉하는 그 길밖에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장삼철/삼건물류 대표 jsc103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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