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乙이 없어 행복한 사회

천주교 신부라고 하면 성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연상하기 쉽지만, 때로는 기관이나 회사에서 일하는 경우도 있고 행정 업무를 맡아 보기도 한다. 필자도 근래 수년간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한 사업체를 관리하고 있는데, 익숙하지 않은 세속 일에 깊이 상관하다 보니 성직자 본연의 모습이 옅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직원을 채용하기도 하고 공사를 발주하기도 하면서 은연중에 고개가 뻣뻣해지고, 사람을 섬기기보다 되레 섬김을 받으려 드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입에 달고서도 모르는 사이에 소위 '갑'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본래 십간(十干)에 속하여 해 넘어갈 때나, 띠 헤아릴 때 말고는 일상과 큰 관련이 없는 글자인 '갑'과 '을'이 갑자기 온 나라의 관심사로 떠오르더니, 급기야 정당의 구호에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계약서를 쓸 때 통상 주문을 하는 쪽을 '갑'으로, 제공하는 쪽을 '을'로 표기하던 관행이 어느새 지배구조를 암시하는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심지어는 어린 학생들까지도 저네들 사이에서 갑과 을을 따진다고 하니, 이게 대체 무슨 꼴인가 싶다.

이해관계가 있고 보면 아무래도 유리하고 불리한 차이가 발생하게 마련이고, 형세의 유리함을 이용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그 자체로 나쁘다고 단죄할 수도 없다. 하지만 잠시의 유리함을 틈타 남의 머리를 밟고 서는 일을 즐긴다면 마음에 병이 든 것이다.

'갑을관계'라는 표현이 담고 있는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모습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정비도 꼭 필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사람 사이에 순위를 매기고 아래'위를 따지려는 충동을 순화해야 하지 않을까?

'영원한 갑은 없다'는 말처럼, 갑이니 을이니 하는 것은 찰나의 구분이고 상대적인 것이다. 인간관계의 변하지 않는 기본은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인간이다'라는 의식이다. 스스로 '을'이라고 생각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기회만 오면 나도 한 번 '갑' 행세를 하겠노라고 벼르고 있다면, 법을 아무리 바꾸어도 '을이 행복한 사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기적이라도 일어나 권력자들과 부자들이 갑자기 겸손해진다 해도,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안에서 존엄을 찾지 못하는 한 '갑'의 횡포와 '을'의 비극은 계속된다.

천주교 대구대교구 문화홍보실장 tinos560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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