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터뷰通] 개그 배달 시키신 분∼ '코미디 철가방' 속 사람들

청도
청도 '코미디 철가방'에서 개그맨의 꿈을 차근차근 이뤄가고 있는 김동익(왼쪽), 옥심이 씨는 "목표가 분명한 만큼 늘 행복한 하루"라고 말했다.
'코미디 철가방에'에는 개그맨의 꿈을 이루겠다는 지원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매일신문 DB

팔조령 고갯길에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쏟아진다. '평일인데다 비까지 오니 오늘 공연은 꽤나 썰렁하겠는걸….'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임을 이내 깨닫는다. 객석은 이미 만석이다. 관객들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하다. '그래, 실컷 웃어주겠어. 어디 얼마나 웃기는지 한 번 해봐!'

이윽고 막이 오른다. 공연의 시작은 배우들의 춤과 노래다. 객석까지 뛰어들어 하이파이브를 나눈다. '짠짜라 짠짜라짠~ 짠짜라 짠짜라짠~ ' 가사도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영화 '철가방 우수 씨'에 나왔던 '철가방을 위하여'(이남이 작곡'이외수 작사)란 노래다. '면발이 길까요 인생이 길까요 일단은 살아봐야 아는 거지요. 번개가 빠를까요 철가방이 빠를까요 일단은 주문부터 해보시지요.' 세상을 웃겨보겠다는 야무진 각오 하나로 청도 골짜기에 모여든 '코미디 철가방' 단원들과의 유쾌한 만남은 그렇게 시작했다.

◆시골 소극장의 '반란'

청도 풍각면 성곡리에 있는 (사)청도코미디시장의 소극장 '코미디 철가방'은 이미 청도의 명물로 자리매김했다. 2011년 5월 문을 연 이후 누적 관람객이 조만간 3만 명을 돌파할 전망이다. 관객은 대구경북뿐 아니라 전국에서 찾아온다. 대도시는커녕 국도에서도 한참 떨어진 외진 곳에 자리 잡은 소극장(40석)이 거둔 성과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이곳의 성공은 물론 '기획공연의 대가' 전유성(64) 씨가 무대 뒤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개그맨의 대부'로 알려진 그는 중국음식점 철가방을 본뜬 극장 외관 디자인을 직접 챙겼고, '20명 이상 단체는 공연시간 주문 가능, 개그도 짜장면처럼 배달'이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눈길을 잡아끄는 마케팅이 전부는 아니다. 24시간 내내 아이디어를 찾고, 연기를 고민하는 배우들의 치열한 노력이 없었다면 시골 소극장의 '반란'은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이쯤 되면 어느 정도 연기에 물이 오른 단원들이 대부분일 것이란 생각이 들게 마련. 그러나 21명의 단원 대부분은 20대 중반이고 최고참급이라봐야 겨우 서른 살이다. 게다가 상당수 단원은 연기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코미디 경험도 없다. 이제 막 생애 첫 무대에 오르고 있는 셈이다. 이곳에서 '시장'으로 불리는 전유성 씨 역시 지도하되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편하게 하라"는 알 듯 모를 듯한 선문답만 던진다. 공부는 모두 자신의 몫이다.

나이가 가장 많아 '영감'으로 불린다는 김동익(30) 씨 또한 막연한 희망만 갖고 재작년 가을, 서울에서 내려왔다. 집안 형편 탓에 대학 진학은 엄두도 못낸 채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겨우 생계를 이어가던 때였다.

"친구들은 다 자신의 길을 가는데 난 뭐하고 있나 하는 자괴감만 있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외모도 평범하고 학벌도 없잖아요? 멋모르고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가 모아놓았던 전 재산도 다 날린 상태였고요. 그때 마음을 달래려고 읽었던 책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었는데 나도 무엇이든 한 번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음날 무작정 청도로 왔습니다."

'코미디 철가방'의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우선 '코미디시장'의 단원이 되어야 한다. 오디션도 있다. 다만 실력을 보는 게 아니라 열정을 본다는 게 차이점이다. 김 씨가 오디션에서 받았던 질문은 "1년 동안 청소만 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느냐"는 것이었다.

"청도역에 내려 물어물어 걸어서 갔더니 한밤중이 됐더라고요. 연습하던 선배들이 적지않게 놀란 눈치였어요. 짧은 스포츠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제 첫인상을 두고 '범죄자가 숨으러 온 게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다고 하더군요. 하하하. 연기는 완전 '발연기'였지만 10년이라도 시켜만 주면 청소하겠다고 대답했더니 의욕을 인정해주시더군요."

김 씨의 '달콤한 은둔'은 지난해 들통이 나버렸다. TV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이 극장이 소개되면서 김 씨도 출연했기 때문이었다. "지방에서 기술 배우고 있다고 부모님께 거짓말을 했었는데 방송 며칠 뒤에 어떻게 아시고는 전화를 걸어오셨어요. 그냥 '잘 봤다. 열심히 해라'라고만 하시는데 가슴이 먹먹해지더군요. 제게는 개그맨이 최후의 꿈인 만큼 후회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지요." 나중에 유명해지면 꼭 다시 인터뷰하러 와달라는 김 씨는 내년에는 방송사의 신인 개그맨 선발대회에 도전할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일터가 아니라 놀이터?

1시간 30분가량 이어지는 공연에서는 관객과 배우가 따로 없다. 구경온 아주머니'아저씨는 손에 이끌려 올라간 무대 위에서 숨겨놓았던 끼를 발휘하고, 개그맨들은 객석에 앉아 추임새로 분위기를 띄운다. TV에서나 보던 '개그 콘서트'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재미에 관객들은 거지 역할을 하는 배우에게 실제로 지갑을 열기도 한다. 운이 좋으면 전유성 씨와 기념촬영을 하는 '횡재'도 누릴 수 있다.

공연이 끝난 뒤 관객들은 우르르 떠나가지만 무대의 막은 내려오지 않는다. 대본도 쓰고, 스태프 역할도 하고, 소품도 직접 만드는 코미디시장 단원들이 내일의 공연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모자를 눌러 쓴 전유성 씨도 잠시 짬을 내 지켜본다.

하루 두세 차례의 공연에 피곤할 법도 하지만 표정들은 밝다. 마치 일터가 아니라 놀이터에 놀러 나온 듯한 모습이다. 지난해 9월 무작정 짐을 싸들고 찾아와 눌러앉았다는 정의엽(24) 씨는 마술 코너를 준비하다 넘어져 뇌진탕 부상을 입었다. 무대공포증은 그 후유증이었다. 하지만 관객들의 박수는 그를 다시 일으켜세웠다.

"정말 무대 위에서 쓰러진다는 각오로 다시 나갔는데 관객들이 웃어주시니까 저절로 힘이 나더군요. 요즘은 공연이 너무 재미있어 혼자 정신줄을 놓을 지경이라니까요. 제가 즐거워하니까 관객들의 호응이 더 좋아지고, 저는 더 열심히 하게 되는 것이죠. 남을 웃기는 일만큼 보람된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관객들만 전국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단원들도 대부분 수도권, 부산경남, 호남권 출신이다. 대구경북 출신은 5명에 불과하다. '개그맨'이 되겠다는 꿈이 이들을 청도의 한적한 들판으로 이끈 셈이다.

경규황(27) 씨는 경기도 광명 출신이다. 서울 시내 한 IT벤처회사에서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로 일하다 사표를 쓰고 청도 행(行)을 택했다.

"어려서부터 웃기는 걸 좋아했지만 남들처럼 대학도 가고 취직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내가 정말 잘하고 좋아하는 일이 무얼까 고민하다가 지난해 봄 사표를 썼지요. 부모님도 많이 반대하셨지만 저는 앞으로 더 잘할 자신이 있어요."

단원들의 리더인 '반장' 최형승(27) 씨 역시 서울에서 왔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다 휴학한 상태다. 짐 캐리 같은 희극배우가 목표다.

"개그맨 콘테스트에 나갔다가 탈락의 아픔도 두 번이나 맛봤죠. 제가 천재가 아닌 이상 어딘가 소속되어서 연기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기 왔어요.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이곳만큼 편하게, 즐겁게 무대를 배울 수 있는 곳은 전국 어디에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꿈을 향해 뚜벅뚜벅

지금 무대에 서고 있는 단원들은 코미디시장 3기 교육생 출신이다. 며칠이라도 머물렀던 사람까지 치면 80명이 넘는 동기 가운데 20여 명만 살아남은 셈이다. 전유성 씨가 2001년 서울에서 모집했던 1기 선배들인 김대범'박휘순'신봉선'안상태'황현희와 같은 걸출한 개그 스타를 목표로 청도까지 찾아왔지만 뜻을 이루기는 쉽지 않다는 뜻이다.

생활 역시 빠듯하다. 20명이 넘는 대식구가 공연장 인근 주택에서 합숙한다. 식사 준비 등 살림살이는 당번제로 돌아가며 맡는다. "설거지, 빨래, 청소하느라 주부 습진이 걸렸다"며 수다를 떠는 단원들의 표정이 익살스럽다.

아직은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아마추어들이지만 단연 발군의 실력을 뽐내는 이도 눈에 띈다. 연기 경력 10년차라는 옥심이(30) 씨다. 넉넉해 보이는 몸매에 구성진 전라도 사투리로 아줌마 역할을 능청스럽게 해내는 모습에서 관록이 저절로 느껴진다. 전유성 씨의 대학 제자인 까닭에 전 씨를 교수님으로 부르는 유일한 단원이기도 하다.

"원래 서울 출신이에요. 서울 대학로 연극'뮤지컬'개그 무대에도 섰고, '웃찻사' '코미디 하우스' 같은 방송 프로그램에도 여러 번 출연했어요. 제 몸매가 개그하기에는 딱이잖아요? 하지만 교수님 옆에 있어야 더 큰 그릇이 될 것 같아서 미련없이 내려왔습니다."

옥심이 씨는 역량을 인정받아 '개인 활동'도 하고 있다. 단원 2명과 함께 '3교시'라는 팀을 꾸려 기업체 등에서 리더십'성희롱 예방 교육 강사로도 뛰고 있다. 사전 취재를 바탕으로 대본을 짠 뒤 1시간 정도 공연하는데 반응이 좋다고 귀띔했다.

"예전에 내가 행복한 게 좋을까,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게 좋을까 하는 문제로 깊이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교수님한테 자문했더니 '네가 행복해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이제는 방송에 대한 욕심을 버렸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별로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거든요. 여기가 너무 좋아 굳이 서울 갈 필요도 못 느낍니다."

단원들의 하루는 길다. 오전 8시에 기상해서 아침을 먹은 뒤 9시 30분쯤 출근길에 나선다. 극장에 도착해서는 코너별로 연습을 마친 뒤 공연에 돌입한다. 월요일을 제외한 평일에는 오후 2시, 토'일요일과 공휴일에는 오전'오후에 3차례 상설 공연한다. 단체가 원할 경우에는 밤 9시에도 무대에 오른다.

잠자리에 드는 건 새벽 1, 2시는 돼야 한다. 웃고 떠들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즉석에서 각본을 짜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외로울 때도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없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장밋빛 미래를 떠올리며 버티고 있다는 게 이들의 솔직한 고백이다.

철가방 소극장은 요즘 신입 단원인 4기 모집을 진행하고 있다. '내공'을 쌓아 개그맨의 꿈을 이루겠다는 지원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아이디어 창작법, 코미디 연기, 무용, 마술, 저글링 등 교육은 무료이며 주말에 진행한다. '코미디 철가방'의 김준오 매니저는 "방송사 예능 PD들이 공연을 보고 가기도 하고 전유성 대표가 직접 추천하는 경우도 있다"며 "세상을 웃겨보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누구나 환영""이라고 했다.

글'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사진'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