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은 소나기가 흩뿌리고 지나간 듯 젖어 있었다. 그렇지만 달아오른 아스팔트 열기 탓인지 불어오는 바람조차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아마 그것은 장례식장 특유의 꺼림칙한 분위기도 한몫을 했으리라. 하얀 국화에 둘러싸인 친구의 영정사진을 보자 만감이 교차했다. 편모슬하에서 줄줄이 형제들과 찢어지게도 가난하게 자랐다. 배움 같은 것은 사치였다. 어려서부터 이곳저곳 떠돌며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스무 살이 다 되어서야 이곳 조선소에 자리를 잡았다.
멀쩡한 목숨을 스스로 끊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악착같이 살고자 하던 이는 이렇게 허망하게 가 버렸다. 남부러울 게 없을 정도로 배우고 가졌지만 늘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이가 있다. 반면 배우지 못하고 물려받은 땅뙈기 하나 없어도 묵묵히 일해 모범적인 가정을 이룬 이도 있는 것이다. 친구는 그뿐만 아니었다. 병든 노모를 모시고 동기들까지 살피는 훌륭한 가장이었다. 사람 구실 못하는 '잉여인간'이 넘쳐나는 요즈음이라 더욱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밤이 되자 조선소 사람들이 단체로 조문을 왔다. 우리 고향 친구들은 자리를 비켜야만 했다. 누군가가 노래방으로 가자고 했다.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문상을 와서 가무(歌舞)까지 하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을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달리 생각했다. 고인의 혼을 불러내 마지막으로 같이 놀아보는, '초혼제'(招魂祭)도 그 나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우리는 슬픈 노래를 부를 때면 진심으로 친구의 명복을 빌었고, 살아 있음을 실감하기 위해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밤이 유난히 짧은 여름, 새벽은 이미 저만큼 와 있었다. 다들 돌아갈 데가 있었지만 나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첫차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영순이만 집이 근처라며 서 있었다. 같이 걸었다. 아파트 정자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찍 떠나버린 남편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결혼한 딸과 아들을 향한 사랑, 치매가 걸려 모시고 있는 친정엄마에 대한 연민 등을 들으며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 친구가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날은 곧 새었다. 영순이와 나는 택시를 타고 방어진 터미널로 갔다. 김밥집이 있어 들어갔다. 김밥을 입에 넣어 보았지만 나무토막을 씹는 듯했다. 콩국수를 시켜 시원한 콩국을 들이켜니 오장육부가 다 시원해졌다. 곧 첫차가 출발한다고 했다. 차창 밖의 영순이가 손을 흔들었다. 나도 웃어 주었다. 반달눈이 무척 아름다웠던 영순이는 어릴 때 나를 참 좋아했노라고 했다. 피로가 엄습했다. 의자를 뒤로 젖히고는 축 늘어진 몸을 던졌다.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장삼철/삼건물류 대표 jsc103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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