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죽의 부채에 써 준 글이 마지막이었나?
사대부들은 누정(樓亭)에서 많은 시문을 음영(吟詠)했다. 친지를 만나거나 가객을 만나도 시문을 읊었다. 주색(酒色)이라고 했다. 하루의 피곤을 술로 풀고 여자를 가까이 하면서 일생을 보냈던 선비들이 있었는가 하면, 풍류시인 백호 임제의 시조에서는 황진이 묘를 찾아 애절하게 음영했던 시문도 본다. 관서평사를 지내던 백광홍이 낙향하던 중 고죽 최경창을 만나 그의 부채에 써주었던 시문에서는 안주의 몽강남을 찾아보라는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관서명승 큰 강마다 꽃 정자에 눈 팔면서
백상루에 가거들랑 누각 아래 물어보소
푸른 창 넌지시 넘보는 몽강남이 있을테니
關西名勝大江三 處處花亭駐客馬參
관서명승대강삼 처처화정주객참
君到百祥樓下問 碧片悤應有夢江南
군도백상루하문 벽창응유몽강남
【한자와 어구】
關西: 여기선 평안북도 접경지역/ 名勝: 명승지/ 大江三: 큰 강(압록강'대동강'청천강) 셋/ 花亭: 꽃 정자/ 駐: 머물다/ 客馬參: 나그네의 마차/ 君到: 그대가 도착함/ 百祥樓: 청천강 가에 있는 누각/ 碧片悤 : 푸른 창/ 應: 응당, 반드시/ 夢江南: 몽강남(사람 이름), 곧 기봉 백광홍의 정인(情人).
'고죽의 부채에 써 준 글이 마지막이었나?'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가인 기봉(岐峯) 백광홍(白光弘'1522~1556)은 관서평사를 지냈다. 그가 쓴 가사 '관서별곡'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보다 25년이나 앞서 기행가사의 효시(嚆矢)로 알려진다. 34세에 병으로 귀향하는 도중에 쓴 시이며 이후 객사했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관서의 명승으로 큰 강이 셋이 흐르나니/ 곳곳마다 꽃 정자가 객의 수레 머물게 하네/ 그대 백상루에 가거들랑 누각 아래 물어보시게/ 푸른 창엔 분명히 몽강남(夢江南)이 있을테니'라는 시상이다.
병이 깊어 귀향하는 도중에, 백상루를 향하는 도중에 기봉은 고죽 최경창을 만난다. 가객 시인에게 어찌 여인이 없을쏜가. 황진이나 이매창 같은 시걸(詩傑)은 아닐지라도 기막힌 사연을 담았던 몽강남 같은 기녀와 아기자기한 로맨스쯤은…. 위 시의 제목 밑에 다음과 같은 부제가 붙어 있어 그 사연이나마 우리는 알 수 있다.
"공이 평사가 되었을 때 안주의 기생을 사랑했다. 병으로 교체되어 돌아오다가 길에서 고죽과 만나서 이 시를 써주었다. 고죽은 부채를 기생에게 주었더니 기생이 구슬퍼하는데 이미 부고가 이르렀다"(公爲評事時 眷安州妓 以病遞還 路逢交承孤竹 題此詩於扇 孤竹以贈扇妓 妓慘然而已訃至)에서 보인다.
화자는 명승지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등 관서지방의 절경을 묘사하면서 백상루에 가서 누구에나 몽강남 기생을 물어보라고 한다. 그 아리따운 여인을 만나거든 안부나마 전해달라고 간곡히 청하는 위 시문에서 깊은 정감을 느끼게 된다.
문화관광부로부터 2004년 '6월의 문화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던 기봉(岐峯) 백광홍(白光弘)은 조선시대 문장가였다. 전남 장흥 출신으로 일재(一齋) 이항(李恒'1499~1576)을 스승으로 뒀다. 벼슬보다 학문에 뜻을 두고 성리학 연구와 시 창작에 몰두했다.
1552년 문과에 급제, 홍문관 정자(正字'정9품)에 임용돼 3년간 순수 학문연구기관인 '호당'(湖堂)에서 학업에 정진하였으나 1555년 평안도 평사의 벼슬을 받아 외직에 나서게 됐다.
'관서별곡'은 그가 왕명을 받아 관서 지방을 향해 출발하는 것부터 부임지를 순시하는 노정을 시적 운치로 그려낸 기행가사다. 관서별곡은 송강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에 직접적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중 34세로 작고했다. 저서로는 한시 130수와 '관서별곡' 등을 모아 1899년 엮은 '기봉집'(岐峯集)이 있다.
장희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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