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빠를 집으로] <6·끝> 직장 어린이집이 능사 아니다

지하철 왕복 2시간 거리 아빠 따라 직장어린이집, 지친 아이 결국 코피가

KT일산지사 한쪽에 설치돼 있는 직장어린이집. 이곳은
KT일산지사 한쪽에 설치돼 있는 직장어린이집. 이곳은 '어린이집 공유'가 잘 이뤄지고 있는 어린이집으로, KT 직원 자녀뿐 아니라 인근 직장 직원들과 대화동 주민들의 자녀들도 다니고 있다.
어린이집 바로 옆에는 아담한 공원이 있다. KT일산지사 어린이집 아이들은 공원을 놀이터 삼아 매일같이 뛰어논다. 카메라 앞에서 각양각색의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들이 천진난만하다.
어린이집 바로 옆에는 아담한 공원이 있다. KT일산지사 어린이집 아이들은 공원을 놀이터 삼아 매일같이 뛰어논다. 카메라 앞에서 각양각색의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들이 천진난만하다.

우리나라 남성 육아휴직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500년 전 세종은 공공기관에 소속된 노비가 아이를 낳으면 100일간 휴가를 줬으며, 남편이 돕지 못해 노비 산모와 태아가 모두 죽는 사건이 발생한 뒤엔 노비 남편에게도 육아휴직 30일을 줬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육아 제도는 선조의 지혜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법에는 남녀 근로자가 똑같이 12개월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돼 있지만, 현실은 갈 길이 멀다. 우리나라 육아 문제, 어떻게 풀어야 할까.

◆ '공유'하는 직장 어린이집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동에 있는 KT일산지사. 이 건물 1층에 위치한 'KT일산지사 어린이집'(이하 KT어린이집)은 겉모습만 보면 다른 직장 어린이집과 별다른 차이가 없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차이점이 보인다.

현재 어린이집에 있는 아이들은 모두 43명. 이 중 KT 직원 자녀는 13명이며, 나머지는 모두 외부인이다. 이처럼 외부인 자녀가 많은 데는 이유가 따로 있다.

KT어린이집은 지난해 3월부터 근처에 있는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하 건기원)과 '공동보육' 협약을 맺었다. 당시 KT는 자사 직원들의 어린 자녀 수가 적어 어린이집 정원이 남는 문제를 겪고 있었고, 건기원은 직장 어린이집 설치를 논의하고 있을 시기였다.

이때 누군가 공동보육 아이디어를 냈고 곧장 실행됐다. 그 결과 KT어린이집은 아이 수가 적절히 유지돼 운영비 부담을 줄였고, 건기원 측은 인력과 어린이집 시설 설치비를 따로 투입하지 않고 직원들에게 복지 혜택을 줄 수 있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황이 됐다. 건기원 직원 자녀는 17명으로 KT 직원 자녀 수보다 많다.

KT어린이집 조영진 원장은 "직장 어린이집은 자사 자녀 비율이 4분의 1을 넘어야 하는데 다른 직장 어린이집과 달리 KT는 직원 자녀가 부족했다. KT와 건기원 측의 상황이 잘 맞아 이 같은 공동 보육이 시작됐고, 일산백병원과 협약을 맺어 병원 직원 자녀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어린이집은 정원이 남으면 다음 기회는 지역 부모들에게 나눠준다. 현재 이곳 아이들 5명은 지역 주민들의 자녀로, 만 3세 아이 7명이 입소 대기자 명단에 올라와 있다. 대신 중간에 KT 직원 자녀가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도록 1, 2명 정도 자리를 남겨둔다.

조 원장은 "어린이집 결원이 나면 1순위는 KT, 2순위는 건기원과 백병원, 그다음 기회가 지역 주민에게 돌아간다. 국공립 어린이집에 맡기는 비용으로 양질의 보육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일반 시민들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직장 어린이집, 근본 대안 아니다

영유아보호법에 따르면 상시 근로자 500명 이상 또는 상시 여성 근로자 300명 이상인 기업은 직장 어린이집을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 하지만, 직장 어린이집도 육아 문제의 근본 대안은 아니다. 지역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어린이집은 한계가 있기 때문.

KT어린이집에는 일산 지사에 근무 중인 직원 자녀는 단 2명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다른 지사에 근무하면서 집이 어린이집 근처인 KT 직원 자녀다.

세 살 된 아이를 키우는 직장인 정모(34'여'대구 동구 각산동) 씨는 "직장에서 집까지 지하철로 왕복 2시간이 걸리는데 차가 없는 엄마들은 회사까지 아이와 함께 출근하는 것 자체가 전쟁"이라며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한참 걸어야 하는데 출퇴근길에 아이와 매일 같이 왔다갔다하며 고생하는 것보다 집 근처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이 엄마와 아이 모두에게 나은 선택"이라고 하소연했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직장인 김모(32'여) 씨도 "내 주변에서 아빠 따라 지하철 타고 직장 어린이집으로 출퇴근하던 아이가 코피를 터뜨리는 경우도 봤다. 직장 어린이집은 매우 좋은 정책이지만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은 집 근처 어린이집을 정부가 잘 관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근본적인 방향은 지역 곳곳에 국'공립 어린이집을 확충하는 길이다. 단지 보육료 부담만 경감시킬 것이 아니라 부모가 신뢰할 수 있는 어린이집이 집 근처에 많아져야 한다는 말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전국에 있는 어린이집은 4만2천527곳. 이 중 국공립 어린이집은 2천203곳으로 전체의 5.2%에 불과하다.

대구의 사정은 더 심각하다. 대구 전역에 1천580곳의 어린이집이 있지만 이 중 2.4%인 39곳만 국공립 어린이집이다. 전체 90%가 공립 데이케어센터인 '육아 선진국' 핀란드와는 전혀 딴판이다.

현재 여성가족부는 직장 어린이집 설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기업들이 건물을 신'증축하면서 어린이집을 설치하면 '용적률 완화'라는 인센티브를 주고, 직장 어린이집 설치비 지원 한도를 2억원에서 3억원으로 인상하는 식이다.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기업은 보건복지부와 노동부 등 관계부처 홈페이지에 1년간 공개하고, 5개 이상 일간지에도 게시하는 등 제재 수위도 높였다.

직장 어린이집은 시설 운영비에 회사의 지원금이 추가로 들어가니, 보육료와 학부모 부담금에 의존하는 민간 어린이집에 비해 보육 질이 높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한 어린이집 관계자는 "직장어린이집 확대 이면에는 국공립 어린이집을 늘리는데 어마어마한 국가 예산이 필요하니 이 같은 부담을 기업에게 넘기려는 정부의 계산이 숨어 있다. 법으로 명시된 기업의 '의무'를 강조하며 기업 돈으로 양질의 어린이집을 확충하는 방법을 펴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 가족친화기업, 정부가 장려해야

전문가들은 오히려 육아휴직 사용을 적극 장려하는 기업에 정부가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주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말한다. 여성가족부는 직원의 자녀 출산 및 양육 등을 지원해 가족 친화적인 환경을 만드는 기업들을 매년 선정해 '가족친화기업'으로 인증하고 있다.

하지만, 가족친화기업으로 인증을 받는다고 해도 기업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은 아주 미미하다. 제품 포장과 용기에 인증 표시를 활용해 홍보하거나, 중소기업의 경우 조달청이나 중소기업청 구매 입찰 시 가산점을 주는 정도가 전부다. 여성가족부의'가족친화인증 기업 및 기관 현황' 통계에 따르면 이 같은 기업은 총 253곳, 이 중 중소기업은 76곳에 불과하다.

육아정책연구소 육아지원연구팀 유해미 팀장은 "우리나라는 고용보험에서 육아휴직자 수당이 지급되기 때문에 육아휴직자가 많아지면 대체 인력도 채용해야 하는 등 기업 부담도 커진다"며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 입장에서 직원들이 육아휴직을 많이 쓸 경우 어떤 혜택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가족친화기업으로 인증받아도 정부가 주는 인센티브가 거의 없다. 기업들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도록 지원금 혜택처럼 파격적인 유인책이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또 유 팀장은 법에만 있는 남성 육아휴직을 현실에서 쓸 수 있도록 실효성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노르웨이처럼 남성들의 육아휴직 사용을 일정 기간 의무화하는 '아빠 할당제'를 도입해 이 기간만이라도 휴직 급여 수준을 높이는 방법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 노르웨이 남성들은 육아휴직 기간 중 총 급여의 70~100%를 휴직 급여로 받지만 우리나라는 통상임금의 40% 수준이다.

유 팀장은 "자녀 출생 뒤 1~2개월 정도만 남성이 육아휴직을 무조건 쓸 수 있는 쿼터제를 도입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며 "현재 통상 임금의 40% 수준인 휴직 급여를 이 기간에만 70~100%로 보장한다면 자녀 양육에 참여 의지가 강한 요즘 아빠들이 경제적인 걱정을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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