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100세 시대 은퇴의 재발견] <2부> 행복한 은퇴자들 (20)농사·취미생활 서동열 씨

소일거리 있죠, 친구 있죠…인생, 깨알처럼 즐기며 살아

집 앞에 심어놓은 사과나무 밭에서 일하고 있는 서 씨 부부. 이들은 큰 재산은 갖고 있지 않지만 건강한 몸과 서로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있어 더없이 편하다고 했다.
집 앞에 심어놓은 사과나무 밭에서 일하고 있는 서 씨 부부. 이들은 큰 재산은 갖고 있지 않지만 건강한 몸과 서로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있어 더없이 편하다고 했다.
서예는 그가 70세가 되던 해에 시작한 취미생활이다. 지금도 1주일에 한 번씩 동구에 있는 아양문화센터에서 배우고 있다.
서예는 그가 70세가 되던 해에 시작한 취미생활이다. 지금도 1주일에 한 번씩 동구에 있는 아양문화센터에서 배우고 있다.

평범한 생활이라고 했다. 그냥 아내와 함께 늙어가고 있고 남에게 욕먹지 않는 삶을 살고 있으며 심심하지 않을 만큼의 취미생활을 즐긴다고 했다. 인터뷰하기엔 좀 밍밍하지 않겠느냐며 걱정스러워했다.

서동열(74'대구시 동구 숙천동) 씨. 그는 20대에 당구장을 시작해 양계업과 섬유업을 했다. 그리고 농사를 짓다 지금은 집 앞터에 사과와 매실을 재미 삼아 키우면서 아내와 더불어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부잣집 3대 독자로 태어나 주위에서 모두 떠받들어준 때문인지 아내 고마움을 제대로 몰랐다는 서 씨. 이제부터라도 고생한 아내에게 잘해주고 싶다고 했다.

전원에서 적당한 농사와 취미생활을 하는 이들 부부의 모습은 편안해 보였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만큼 여유로웠다.

-늙어가는 즐거움이 있다고 했다. 궁금하다.

"자식들 다 키워놓으니 자식 걱정 없고 놀 수 있는 시간이 있으니 정말 여유롭다. 함께 떠들 친구가 있어 마음이 따뜻하고 함께할 아내가 있어 아주 행복하다. 이런 여유와 자유가 내 인생에 언제 있었던가? 이젠 오로지 나와 아내를 위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다. 놓치지 않고 하나씩 깨알처럼 즐기며 살고 싶다."

-어떻게 즐기며 살고 있나.

"60이 되던 해 80세까지 계획을 세웠다. 70이 되자 90세까지 늘려 잡으면서 일부 계획을 수정했다. 그중 하나가 적극적으로 취미생활 즐기기였다. 집에서 어영부영 아내 눈치나 보면서 세월을 보낼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70이 되던 해에 서예를 시작했다. 지금도 동구에 있는 아양문화센터에서 일주일에 한 번 서예를 배우고 있다. 배우는 것도 즐겁지만 젊은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어울릴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즐겁다. 수강생 중 나이가 제일 많다."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쉽지 않다고 하는데.

"돈을 풀면 된다. 하하. 그 정도는 투자해야 되지 않나. 젊은 사람들의 생각과 이야기를 듣다 보면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 거기서 들은 유머나 이야기를 퍼 나르면서 친구들 사이에서 내 몸값이 치솟기 시작했다.(웃음) 이 나이에 어디서 젊은 사람들과 차 마시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나. 젊은 사람들에게 약간의 삶의 지혜를 들려주는 재미도 쏠쏠하다. 또 집 밖을 나가면 긴장하고 외모에 신경을 쓰게 된다. 자신을 가꾸는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아내와 같이 취미생활을 하나.

"아니다. 아내는 노래를 배우고 요가를 한다.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취미생활을 즐긴다. 반드시 같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서로에게 강요하지 않고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지낸다. 같이 할 부분은 또 같이 한다."

-어떤 취미를 같이 하나.

"새벽 5시에 일어나 한 시간 이상 아내와 함께 파워워킹을 한다. 60이 되던 해에 시작했으니 15년 정도 해왔다. 아내와 나 모두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운동하면서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아내의 입장이 되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운동 겸 우리 둘만의 대화 시간이다."

-아내가 보물처럼 보인다고 했다.

"남자들 나이 들면 아내가 보물처럼 보인다. 더구나 나는 오랫동안 내 고집대로 살았다. 아내의 입장을 잘 헤아려 본 적이 없다. 지금에야 그것이 못내 아쉽다. 이젠 아내 위주로 살고 싶다. 그동안 고생했던 것을 다 보상해주고 싶어서다. 마음만 그렇지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 아내를 위해 기껏 하는 것이 외식 정도다."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이것도 아내를 힘들게 한 이유겠다.

"대학 재학 중 군대를 갔다 와서 복학할 때까지 당구장을 운영하게 됐다. 한 달 해보니 공무원 월급의 3배 이상의 수익이 있었다. 돈맛을 알고 나니 공부를 계속 할 수가 없었다. 복학을 하지 않고 사업을 하게 됐다. 2년 정도 당구장을 한 후 양계장을 시작했다. 20대 후반 아버지가 살고 계셨던 지금 이 집에서 닭 3천 마리를 길렀다. 돈을 제법 벌었으나 집안이 송사에 휘말리면서 번 돈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6년 동안 했으나 빈손이었다. 그래서 접고 친척이 하는 섬유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것도 불황이 와서 결국은 40대 후반,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그 당시에는 대구 외곽지였던 지금 이곳으로 와서 농사를 짓게 됐다."

-결국 고향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

"고생을 많이 했다. 농사로 자식들 공부를 시켰기 때문이다. 깻잎농사 사과농사 닥치는 대로 했다. 힘들었지만 지금 이 땅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아내 덕이다. 고맙게 생각한다. 이곳은 대구시이면서 시골 같은 한적함이 있어 살기 좋은 곳이다."

-이 지역을 위해 일도 많이 했다고 들었다.

"18년 전이다. 이 근처에 큰 공장이 있었는데 주민 동의 없이 시설을 확장하려 했다. 마을 사람들과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피해 부분에 대해서 보상금을 받게 됐다. 그 돈으로 동구지역발전회를 만들었다. 회장을 맡았다. 가장 보람된 일은 숙천초교가 분교가 되는 것을 막은 것이다. 데모까지 했다. 지금도 고향을 위해서라면 작은 일에도 힘을 보태고 싶다."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보인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경주 최부자처럼 가진 사람들이 지역을 위해 일을 하면 더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우리 것에 대한 가치를 챙길 줄 아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6'25 때 대구와 부산을 지킨 이들의 기념관 정도는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것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회를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을 뿐이다."

-농사는 어느 정도 짓나.

"그저 심심하지 않을 정도다. 사과 30그루에 매실 100그루 정도다. 이외에 주목 등 조경수를 기르고 먹을 만큼의 채소를 기른다. 사과는 친구들하고 이웃주민들과 나누어 먹을 만큼 수확한다. 매실은 수확량이 많아 수입이 약간 생긴다. 아침밥 먹기 전에 돌보면 될 정도의 농사다."

-앞으로 꿈은?

"아내와 함께 건강하게 늙어가는 것이다. 자식들 짐이 되지 않도록 열심히 운동해서 건강을 지키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그것이 전부다."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사진: 김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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