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자기 PR시대…비즈니스 최고의 도구로 뜬 명함

"튀어야 각인" 소재·디자인 기발하게…인쇄된 타이틀 떼어 내면 남는

대구 달서구청은 행정 투명성 강화와 신뢰 향상을 위해 직원들의 명함에
대구 달서구청은 행정 투명성 강화와 신뢰 향상을 위해 직원들의 명함에 '스마일링'이란 문구를 새기도록 하고 있다.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저는 나이가 꽤 됩니다. 지나온 세월에 비해 덩치는 크지 않고요. 네모난 얼굴에 피부는 하얀 편이지만 까만 점이 꽤 많습니다 ㅋㅋ. 친구 중에는 알록달록하거나 심지어 투명한 녀석들도 있지요. 최근에는 바람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비기(秘技)를 갖춘 신기한 후배들도 하나 둘 보이더군요. 이름이 인터넷 뭐라던가, 모바일 뭐라던가?

저는 여러분께 알려 드릴 게 많습니다. 이름이 뭐예요, 전화번호 뭐예요, 귀찮게 묻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손만 잡아주시면 주인님이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에 주로 계신지도 살짝 귀띔해 드릴게요. 눈치가 빠른 분이라면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주인님의 재산, 학력, 성격을 바로 알아차릴 수도 있어요. 제가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 아시겠죠? 단언컨대 저는 가장 완벽한 비즈니스 도구입니다. 제 이름은 명함입니다.

◆각인의 기술

제가 처음 등장한 건 기원전 2세기 중국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지금과는 조금 다른 형태였대요. 아는 사람 집에 들렀다가 상대방이 집에 없으면 다녀간 걸 알리려고 대나무를 깎아 이름을 적어뒀다고 해요. 유럽에서는 16세기부터 쓰였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893년 민영익(1860∼1914) 선생이 처음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구한말의 대신이자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이시죠. '조선보빙사'(朝鮮報聘使'국가를 대표해 외국을 방문하는 사절) 자격으로 미국과 유럽을 찾았을 때 만들었답니다. 그런데 요즘과 달리 붓글씨의 자필 이름만 적혀 있어요. 친근감이 느껴지고 인간미가 나지 않나요?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저를 참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 같아요. 이름과 직장'직위'주소'전화번호는 기본이고 자랑할 만한 건 모두 담고 있지요. 학교는 어디를 나왔는지, 박사학위는 있는지, 어디어디에서 무슨 경력을 쌓았는지, 책은 몇 권을 썼는지…. 아무리 자기 PR이 중요한 시대라고는 해도 처음 받자마자 부담스러울 때가 많으실 거예요.

몇 년 전부터 QR(Quick Response) 코드를 제 얼굴에 넣는 경우도 많아졌어요. 스마트폰이 널리 확산되면서지요. 말 그대로 휴대전화로 스캔만 하면 순식간에 기업의 사업내용 같은 정보가 주르륵 뜨지요. 시시콜콜한 정보를 활자로 빽빽하게 기입해둔 것보다 깔끔하긴 해요.

혹시 '망각곡선'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독일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Hermann Ebbinghaus)가 기억률의 시간적 경과를 그래프로 그린 것이지요. 실험 결과 인간은 학습한 뒤 1시간 뒤에 반을 잊어버린답니다. 그래서인지 자기를 더 오래 기억해달라는 뜻에서 제 얼굴에 진한 화장을 입히는 사람도 있어요. 1990년대 후반엔 얼굴 사진, 21세기 초에는 캐리커처를 넣는 것이 유행했죠. 또 자신이 좋아하는 시 한 편, 그림 한 점을 곁들이기도 하고 식당'병원 같은 곳은 약도를 즐겨 넣습니다.

튀어 보이기 위해 평범한 종이 대신 플라스틱이나 얇은 철판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우둘투둘한 점자를 새겨놓기도 해요. 글쎄요, 1년에 시각장애우들을 몇 명이나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대구 남산동에 있는 한길기획 이호민(46) 대표는 "인쇄기술이 발달하면서 좀 더 특이한 명함을 찾는 고객이 늘고 있는 추세"라며 "예술계, 정치계에 있는 분들이 눈에 확 띄는 디자인을 선호하는 것 같다"고 하네요.

물론 저를 통해 최소한의 정보만 전달하려는 사람들도 있어요. 국가정보원 직원들이 대표적인데 이름과 전화번호만 써두지요. 정부 고위관료 등 '높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사무실 전화만 기입해둔 경우도 종종 있어요. 괜히 휴대전화 번호를 가르쳐줬다가 생길지도 모를 귀찮은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이겠지만 조금 얄밉지 않나요?

◆권위주의의 산물?

사람들은 저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아요. '제2의 얼굴'이란 표현은 저를 가장 잘 나타내는 표현이지만 때로는 듣기 싫은 '메타포'(metaphor'은유)도 있어요. '명함도 못 내민다'는 말은 다들 흔히 쓰시죠? 실제로 이런 상황에 처해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경험들 아마 있으실 겁니다.

영화 속에서는 명함 한 번 잘못 내밀었다가 죽기도 하죠. 2000년에 개봉했던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American Psycho)였지요. 아무것도 부러울 것 없는 주인공 패트릭 베이만 (크리스찬 베일 분)이 동료를 도끼로 살해합니다. 단지 자신보다 고급스럽고 세련된 명함을 가졌다는 이유에서요. 물질만능주의와 현대인의 정신적 황폐함을 비꼰 장면입니다.

'명함에 한 줄 더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대개 승진하거나 박사학위나 큰 상을 받았을 때 쓰곤 합니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진 요즘은 '명함 바꿨다'는 말도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제가 '권위주의의 산물'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지요. 자신의 지위를 소개하는 저를 타인에게 건네는 순간부터 '나, 이런 사람이야. 알아서 대우해줘' 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관계자들에게 명함을 만들지 않도록 했지요. 인수위에 몸담았던 새누리당 한 고위 당직자는 "인수위를 내세워 호가호위하는 말썽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며 "명함을 사용할 경우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했어요.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을(乙)의 입장에서는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이런 일을 하는 동안 앞으로 잘 모시겠습니다'라는 간곡한 뜻을 전하겠지요. 다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면 갑(甲)은 돌아서자마자 저를 쓰레기통에 휙 던져 버리겠죠. 제가 무슨 죄가 있다고!

리더십 연구의 권위자인 마이크 모리슨 박사는 명함의 앞면보다 '뒷면'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해요. 스펙보다 그 사람의 진정한 내면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는 '명함의 뒷면'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질책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명함의 앞면만 바라보고 달리고 있는지 생각했다. 얼마나 큰 회사에 다니는지, 얼마나 높은 직함을 가졌는지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니까 말이다. 남들의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자기 스스로 명함의 앞면에 인쇄된 타이틀에 집착한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사람들이 가진 자부심의 원천인 '타이틀'을 다 떼어내고 나면 정말 뭐가 남을까요? 제 앞면에 인쇄된 글씨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도 행복하려면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여러분이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예쁜가요

스페인의 사회학자 마뉴엘 카스텔은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를 주장했어요. 현대사회에서는 과거에 비해 인간관계의 양이 매우 많아지고, 소셜네트워킹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파워그룹으로 등장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인맥관리의 달인들은 그래서 저를 소중하게 여기죠. 책상 속에 고이고이 모아 만 두지도 않지요. 일정한 주기를 두고 정리하기도 하더군요. 사실 제가 오래 간직하면 돈이 되는 우표는 아니니까요. 개인용과 업무용으로 나눈 뒤 다시 필요, 불필요한 것으로 분류합니다.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과감하게 버리시는 게 좋습니다. 얼굴도 기억 안 나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두툼한 명함 첩도 점차 사라지고 있어요. 스마트폰 덕분이지요. 저를 스캔'분석하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면 관리가 한결 수월해집니다. 스마트폰으로 저를 촬영하면 명함 정보가 앱 안에 있는 '명함 책'에 자동으로 저장돼요.

처음 만나서 저를 주고받을 때에는 에티켓이 있어요. 좋은 첫인상을 남기려면 기본에 충실하셔야 돼요. 일단,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에게 먼저 건네는 것이 예의죠. 명함집 대신 지갑에서 꺼내 건네면 상당한 결례이고요. 동시에 교환할 때는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가슴 높이로 건네면서 상대방 명함을 왼손 바닥으로 받아야 합니다. 저를 받은 뒤 두 손으로 잡고 한번 보고 나서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하세요. 받자마자 주머니에 넣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죠.

요즘에는 저를 발명에 가깝게 만든 '명작'들도 많아졌어요. 기발한 소재와 독특한 콘셉트가 아무래도 홍보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죠. 외국에서는 반으로 찢어지는 이혼 전문 변호사용 명함, 풍선을 불어야 겉에 쓰여진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호흡기내과 의사용 명함, 비뇨기과 의사용 콘돔 명함이 등장했다네요. 복권 명함, 노인용 돋보기 명함 등도 아이디어가 돋보여요. 어차피 보지도 않고 버려지는 명함을 비꼬는 '먹어서 없애는 초콜릿 명함'은 위트가 넘치지 않나요. 정말 오래 살다 보니 별별 일이 다 생기네요.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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