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순재의 은퇴일기] 너절하지 않기

노화백은 오랫동안 침묵했습니다. 어떤 화가로 기록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한동안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너절하지 않은 화가'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너절한 게 무엇이냐고 묻자 '있으나마나 한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시시하고 하찮은 화가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주 잠깐 영롱하게 빛났다 그냥 사라지는 물방울을 붙잡고 40년 넘게 씨름한 화가 김창열의 인터뷰였습니다.

너절하지 않기. 참으로 짧은 답이었으나 어떤 긴 이야기보다 울림이 컸습니다. 너절하다는 것은 구질구질하고 존재감 없다는 말의 다름일 것입니다. 이유가 많고 변명이 길어지는 시시한 삶을 이르는 것이겠지요.

영화 '라쇼몽'에는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도적보다 전염병보다 기근보다 화재보다 그리고 전란보다 더 무서운 일은 인간을 향한 믿음이 사라지는 것이다'이지요. 그런데 한 인간에 대한 믿음을 거두는데 너절함만큼 크게 기여하는 것은 없을 듯합니다. 사람에게서 너절함을 발견하는 순간, 그동안의 믿음까지 무너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늙음이라는 게 어쩌면 '너절해지는 상태'가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분별력을 잃고 변명이 많아지며 초점이 없어지는 상태 말입니다. 늙기 싫어하는 까닭이지요.

법정 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늙음이 아니라 녹스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녹스는 삶이 바로 너절해지는 삶일 것입니다.

스님은 녹슬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풍부하게 소유할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해야한다고 했습니다. 욕심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깨어있어 반짝이고 꽉 차있어 딴딴한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아 자유로운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했던 이야기를 또 할 때, 남 뒷담화를 열심히 할 때, 괜히 다른 사람 눈치 볼 때, 문득 시시해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녹슬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 말이 많아지고 초점이 흐려진다면 딱 거기서 멈추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한 번 되돌아 보십시오.

너절하지 않기. 삶의 좋은 목표인 듯합니다.

김순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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