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여대생 정은희(당시 18세) 양 성폭행 사건의 범인이 붙잡히면서 영구미제로 남을 뻔한 사건이 15년 만에 극적으로 해결됐지만 여전히 적잖은 궁금증이 남아 있다. 유족 역시 교통사고 등에 대한 의혹이 해소되지 않았다며 아직 딸을 떠나 보내지 못하고 있다.
◆경찰 수사 왜 부실했나
경찰은 교통사고 현장에서 불과 3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서 정 양의 속옷이 발견되고 신체 주요 부위가 심하게 손상되는 등 성폭행 의혹이 짙은데도 불구하고 서둘러 단순 교통사고로 결론짓고 사건을 종결했다.
경찰의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허술했던 초동수사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정 양의 속옷을 찾은 것도 경찰이 아닌 유족이었다. 시신 발견 당시 없었던 속옷을 입혀놓거나 당시 병원 관계자들로부터 '속옷을 입고 있었지만 수습 과정에서 벗겼다'는 진술을 받아내는 등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하기 위해 노력한 정황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DNA 크로스 체크하고도 왜 수사 안 했나
또 하나의 의문과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수사기관이 사건 당시 속옷에서 발견된 정액 DNA와 다른 사건에서 채취한 DNA가 일치하는 용의자가 있음을 확인하고도 수사를 재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9월 대검찰청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DNA를 크로스 체크하는 과정에서 1998년 당시 정 양의 속옷에서 발견된 정액 DNA와 2011년 청소년에게 성매수를 권유한 혐의로 벌금형을 받은 스리랑카인인 이 사건 피고인 A(46) 씨의 DNA가 일치한 사실을 확인하고도 수사 재개를 하지 않다가 올 5월 31일 유족이 검찰에 고소장을 제출하자 그제야 수사를 다시 시작해 밝혀냈다. 정 양에 대한 교통사고 기록 등이 공소시효 만료로 폐기됐기 때문이란 게 이유다.
다시 말해 유족이 올 5월에 고소장을 제출하지 않았다면 DNA가 일치하는 용의자가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넘어갔거나, 알았다 하더라도 수사하지 않아 이 사건은 영구미제로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다른 기관이 확인하지 않은 것에 대해 우리(대구지검)가 뭐라고 할 수는 없다"며 "다만 이번 고소 전 수사에선 DNA 일치자가 없어 범인을 잡지 못했던 것이고, 이번에 고소됐을 때 확인해 보니 일치자가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살해 후 교통사고 위장 가능성은
피고인들이 정 양을 성폭행 후 교통사고로 위장하기 위해 고속도로로 데려갔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는 살해 후 또는 살아 있는 상태에서 고속도로로 데려가 떠밀어 교통사고로 위장했을 가능성으로, 유족 역시 이에 대해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검찰은 법의학 전문가들을 통해 부검 재감정을 의뢰한 결과 살아 있는 상태에서 교통사고로 숨진 게 맞다는 회신을 받은 만큼 위장 교통사고는 아니라는 쪽으로 무게를 두고 있다. 시속 130㎞로 달리던 차량을 향해 옆에서 밀어 사고 나게 하면 서 있는 상태에서 부딪힐 가능성이 없다는 것.
◆스리랑카에 있는 공범 2명 어떻게 되나
A씨는 특수강도강간 등 혐의로 기소됐지만 공범 B(44) 씨와 C(39) 씨 등 2명은 각각 2003년과 2005년에 불법체류자로 적발돼 강제 추방된 상태여서 아직 붙잡지 못한 상태다. 검찰은 우선 이들 2명에 대해 기소중지를 한 뒤 형사사법공조 절차를 통해 검거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 검찰은 한국과 스리랑카 사이에 형사사법공조조약이나 범죄인인도조약이 체결돼 있지 않아 공범 검거가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사법공조 절차를 통해 최대한 검거에 나서기로 했다.
특수강도강간 등 죄는 공소시효가 15년으로 이 사건의 경우 올 10월 16일이 만료일이지만 2010년 DNA 법률이 제정되면서 DNA가 확보된 일부 성범죄의 공소시효가 10년이 연장돼 이 사건 공범들의 법적 처벌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호준기자 hoper@msnet.co.kr
◇故 정은희 양 사건일지
▷1998년 10월 16일 오후 10시 40분
대구 여대생 정은희 양 자신이 다니던 대학 축제에서 술을 마시고 만취한 남자 동기생 데리고 학교에서 나옴
▷1998년 10월 16일 오후 11시
함께 있던 남자 동기생, 학교 근처 병원 앞에서 깨어보니 정 양이 없어진 상태. 연락 안 돼 귀가한 줄 알고 집으로 감
▷1998년 10월 17일 오전 5시 30분
구마고속도로에서 23t 트럭에 치여 사망
▷1998년 10월 17일 오후 1시
교통사고 현장에서 30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정 양 속옷 발견
▷1998년 12월
경찰, 교통사고 트럭 운전자에 대한 혐의 없음 처분 후 단순 교통사고로 사건 종결. 유족, 검찰에 재조사 진정
▷1999년 3월
경찰, 정 양 속옷 국과수에 감정 의뢰. 정액 발견
▷2000년 9월
유족, 담당 경찰관 등 직무유기로 고소, 각하 처분
▷2001년
불기소 처분에 대한 헌법소원 제기, 기각 결정
▷2007년
교통사고 트럭 운전자에 대한 강간살인 고소, 혐의 없음 처분
▷2013년까지 15년 동안 교통사고 운전자, 경찰관 등을 상대로 진정, 고소, 항고, 민원, 헌법소원 등 제기
▷2013년 5월 31일
유족, 대구지검에 고소장 제출
▷2013년 8월 16일
스리랑카인 A씨에 대해 구속영장 발부
▷2013년 8월 30일
검찰시민위원회 회부, 위원 전원의 공소제기 의결
▷2013년 9월 3일
피고인 A씨 구속 기소
댓글 많은 뉴스
대통령실, 추미애 '대법원장 사퇴 요구'에 "원칙적 공감"
지방 공항 사업 곳곳서 난관…다시 드리운 '탈원전' 그림자까지
李대통령 지지율 54.5%…'정치 혼란'에 1.5%p 하락
정동영 "'탈북민' 명칭변경 검토…어감 나빠 탈북민들도 싫어해"
교착 빠진 한미 관세 협상…도요타보다 비싸지는 현대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