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멍석 깔아 놓은 '욕설문화'…속이 정말로 후련합니까?

대한민국 판치는 '디스' 열풍

'새누리를 디스하라.' 최근 디스전은 정치권까지 확산되고 있다.
'똑바로 해' 디스전을 일으킨 미국래퍼 켄드릭 라마.

대한민국은 찬란하고 풍요로운 욕 문화를 자랑한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중국은 표의문자를 쓰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다양한 욕이 생산될 수 없다. 일본말도 지독한 욕은 별로 없다. 프랑스나 독일도 상대되지 않는다. 영국과 미국 등 영미권에서도 기껏해야 서너 가지 정도다.

욕할 거리도 널려 있다. 매일 싸움질하는 정치현실과 부조리한 관행, 파렴치한 행위 등 현실에서 보고만 있어도 욕 나오는 현장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를 자양분으로 힙합에서 욕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사회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다. 디스다. 담배 이름 같지만 원래 '디스리스펙트'(disrespect 무례'결례) 준말로 다른 사람을 폄하하는 행동을 일컫는다. 지난달 시작된 디스대전이 대중문화계를 뒤흔들더니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음악계는 물론 방송'문화계를 장악하더니 일상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디스 열풍' 후끈

회사원 이정훈(33) 씨는 최근 랩 음악에 푹 빠졌다. 학창시절 CD나 MD 플레이어에 구워서 즐겨 듣던 랩 음악과는 다르다. "요즘 귀가 호강합니다. 디스대전이나 컨트롤 대전 등으로 힙합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새롭게 생겼어요. 사회를 풍자하는 욕설들이 얼마나 화려한지 어떤 경우에는 속이 후련합니다."

지난여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디스 열풍'이 숙지지 않고 있다. 힙합 래퍼들 사이에 유행을 타더니 최근에는 일반인들도 가세했다. 이를 따라하거나 패러디하는 등 놀이문화로 성장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하나의 문화코드로 성장한 셈이다.

기자가 인터넷에 '디스'라는 단어를 검색하자 각종 패러디 동영상과 TV 프로그램의 디스전(戰)이 쏟아져 나온다. 여배우를 등장시켜 경쟁 회사를 디스하거나 경쟁 방송을 디스하는 내용도 예사다. 인터넷은 디스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 일부 연예인'정치인의 막말 기사가 올라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디스'가 올라온다. 방송계도 장악했다. 얼마 전 종방한 MBC '무르팍 도사'와 '라디오 스타', tvN 'SNL코리아' 등 감추고 싶은 과거나 치부를 제대로 디스한다.

안철수 의원, 정당,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등 국내외 정치인들이 디스란 도마에 올랐다. 아예 정치권이 '셀프 디스'에 나섰다.

'새누리당에 불만 있는 2030 여러분을 위해 새누리당에서 멍석을 깔아 드립니다. 여러분의 비난과 질타로 인해 새누리당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새누리당은 지난달 6일부터 31일까지 '디스 공모전'을 열기도 했다. '새누리당을 디스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었다. 이 디스전에는 여대생 성희롱 발언 파문으로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에서 탈당했던 강용석 전 의원도 참가해 새누리당으로부터 특별상을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장우영 대구가톨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욕설이 금기시되던 과거와 달리 디스가 하나의 문화처럼 자리 잡았다. 우리 사회의 탈권위주의 문화가 확산하기 때문이다. 비판의 영역이 사라졌고 특정대상을 지목해 비판했을 때 느끼는 양심의 가책도 줄어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힙합에서 출발해 정치까지

발단은 힙합 음악이었다. 미국 래퍼 켄드릭 라마(26)가 미국 래퍼들을 향해 '똑바로 하라'며 디스곡 '컨트롤'을 발표하며 디스전에 불을 붙였다. 그는 올해 미국 힙합계에서 떠오르는 신인. 그는 이 노래를 통해 에미넘(Eminem), 에이셉 라키(ASAP Rocky), 빅 션(Big Sean) 등 대표적인 힙합 뮤지션들을 강하게 비판하며 힙합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라마에게 디스당한 미국 힙합 뮤지션들이 이에 대응하는 노래를 내놓으며 디스전쟁에 불이 붙었다.

미국에서 시작된 디스전은 곧장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 상륙했다. 지난달 21일 스윙스가 'King Swing'을 공개하며 디스전이 시작됐다. "강민호 이센스, 이제 나왔네 회사, 친구이자 팬으로 말할게, 추억 말고 전설되자"라고 소속사 아메바컬처를 나온 이센스를 거론했다. 이를 두고 22일 어글리덕이 스윙스를 맞디스하면서 본격적으로 점화됐다. 이어 10여 명의 우리나라 래퍼들도 이 '컨트롤' 비트에 가사만 바꿔 디스 행렬에 가담했다.

전선도 확대되고 있다. 힙합의 디스는 4종류. 히퍼 간의 디스, 아이돌을 향한 비난, 사회적 부조리의 디스, 서로를 폭로하는 디스다. "성역화된 어떤 정보기관을 점령하고, 자신들의 말에 반대해온, 국민의 절반을 반체제 또는 빨갱이에 놀아난, 꼭두각시로 봤단 사실에 분노할 것임." 이것은 제리케이라는 래퍼의 '시국선언'이란 랩의 일부다. 국정원 선거 개입 사태를 비판한, 곧 부조리한 사회를 고발한 디스다.

일반인까지 참여하게 된 것은 최근이다. 이미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이하 카톡) 등에서 '컨트롤 비트 다운 는다'는 표현은 상대방을 향해 공격을 시작하겠다는 선전포고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카톡에 직장 상사에 대해 불만의 글을 올렸더니 곧장 친구들이 '컨트롤 비트 다운받을래'라며 댓글을 달기 시작하더군요." 직장인 김희진(가명) 씨의 말이다.

◆문화코드 vs 문화의 탈을 쓴 욕설

디스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시대를 반영하는 문화'라는 설명부터 '문화의 탈을 쓴 욕설'이라는 주장까지…. 힙합계는 물론 매스컴 등에는 이를 두고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지고 있다. 디스전을 넘어 또 다른 대전이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방송학부 교수는 "미국 뉴욕 할렘가에서 출발한 힙합이라는 장르가 원래 거칠고 자유분방한 데다 디스는 힙합의 전형적 표현양식 중 속을 털어놓는 것 중의 하나다"면서도 "힙합의 디스 장르가 비난을 넘어 지독한 욕설로 간다면 또 하나의 비판받아야 할 불건전한 문화다. 최근 디스는 돈 문제와 개인적인 원한을 귀를 씻고 싶게 만드는 원색적이고 직설적인 욕설과 독기로 폭로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고 했다.

김 교수는 "속을 털어놓는 것과 대놓고 욕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특히 마구잡이식으로 누군가를 욕하는 문화에 익숙해지면 타인에 대한 존중이 사라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반면, 경멸과 무례가 없으면 디스가 아니다는 의견도 있다. 세상에 건전한 힙합은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문화평론가 박기웅 씨는 "힙합은 하층민들의 한이 담긴 음악이다. 부조리한 사회와 위선을 욕설로 희화화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힘든 삶을 살아낼 수 있었던 힘이기도 하다. 싸우면서 경쟁 상대를 깎아내리는 디스에 경멸과 무례가 없으면 디스가 아니다. 밑바닥의 젊은이들이 말로 싸우는데 욕설이 섞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했다. 또 "살아남기 위한 경쟁은 필수이고 비보이들은 춤 배틀을, DJ들은 스크래치 배틀을, 래퍼들은 랩 배틀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스프레이로 전철이나 도시의 벽면에 남긴 낙서도, 얼마나 빨리 현란하게 그리는지 겨룬 그래피티 배틀의 결과다"고 설명했다.

우리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의견도 설득력이 있다. 김건표 교수는 "서민사회의 불균형, 강한 사람만이 살아남는 사회현상에서 소외된 대중이 생기게 마련이다. 약육강식이 확산하면 인간은 더 강해지고 싶어진다. 그 강함을 표출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이 나타난다. 디스전과 진격의 거인, 막장 드라마 등 끝장과 끝판 문화가 자연스레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디스(diss)=디스리스펙트(disrespect 무례'결례)의 준말로 상대방의 허물을 공개적으로 공격해 망신을 주는 힙합의 하위문화를 일컫는다. 이것이 일반화되면서 욕설, 비꼬기 등의 뜻으로 의미가 폭넓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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