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상학의 시와 함께] 혼잣말

# 혼잣말 -위선환(1941~)

나는 더디고 햇살은 빨랐으므로 몇 해째나 가을은 나보다 먼저 저물었다

땅거미를 덮으며 어둠이 쌓이고 사람들은 돌아가 불을 켜서 내걸 무렵 나는 늦게 닿아서 두리번거리다 깜깜해졌던,

그렇게 깜깜해진 여러 해 뒤이므로

저문 길에 잠깐 젖던 가는 빗발과 젖은 흙을 베고 눕던 지푸라기 몇 낱과 가지 끝에서 빛나던 고추색 놀빛과 들녘 끝으로 끌려가던 물소리까지, 그것들은 지금쯤 어디 모여 있겠는가

그것들 아니고 무엇이 하늘의 푸른빛을 차고 깊게 했겠는가

하늘 아래로 걸어가는 길이 참 조용하다 사람의 걸음걸이로 여기까지 걸어왔구나 더디게 오래 걸어서 이제야 닿는구나 목소리를 낮추어 혼잣말하듯이,

-시집 『새떼를 베끼다』(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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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이라면 몰라도 인생의 이치를 남에게 가르치기란 여간해서는 쉽지가 않다. 용기가 필요하다. 자칫하면 핀잔을 듣기 십상이다. 깨달음이란 얻기도 어렵지만 전하기도 어렵다. 깨달음은 거저 얻을 수 있거나 손쉽게 다다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인생의 이치를 알 만한 때가 되면 이렇게 '혼잣말'을 하게 되는 까닭이다.

빗발과 지푸라기와 놀빛이며 물소리와 더불어 인생까지도 어두운 곳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간 뒤에야 그런 행위가 인생의, "하늘의 푸른빛을 차고 깊게 했다"고 깨닫는다. 어둠과 바닥에 다다르지 않고서야 어찌 알겠으며 그런 생의 이치를 어이 여름날 청춘과 가을날 환희에게 설명할 수 있으랴.

인생은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거두지만 세상은 가을에 온갖 씨를 뿌린다. 인생과 자연의 차이는 이렇듯 현격하다. 하지만 인생도 자연을 닮아내면 이런 혼잣말을 할 줄 안다. 그것은 씨를 뿌리는 언어이자 행위이다.

가을은 세상 모든 물들이 낮아진다. 따라서 하늘은 높아지고 바다는 깊어진다. 하늘은 이슬로 씨를 뿌리고 바다는 차고 맑은 가을 물을 저장한다. 못다 뿌린 물은 겨울이 오면 눈으로 얼려서라도 세상 낮은 곳에 포근하게 뿌려줄 것이다.

안상학<시인 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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