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한국 교민사회에서 '문 회장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런데 빈말은 아니었다. 기자가 시드니에서 문동석(75) ㈜SunMoon 회장을 만나 시드니 도심과 이스트우드 한인타운에서 열린 재호 경북대구향우회 모임을 함께 다니면서 명불허전(名不虛傳)을 실감했다. 한국 교민들은 물론 현지인들까지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지역 유지'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그가 호주에 이민 온 지 44년 넘었고, 사업가로 성공했고, 지역사회와 교민사회에서 많은 활동을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그의 자녀 가운데 세계적인 유명인사도 있다.
◆고 이병철 회장과의 인연
영천 출신인 문 회장은 영천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경북중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영천에서 경북중에 입학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다고 했다. 그런데 중학교 입학 후 성적이 생각만큼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적이 상위권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용의 꼬리가 되느니 닭의 머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대구공고 화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전략적 선택인 셈이죠. 허허."
1960년 대구 제일모직에 취직했다. 입사 직후 고 이병철 회장의 눈에 띄어 '호주 연수'(멜번의 RMIT 대학에서 공부)의 행운을 잡았다. (문 회장 사무실에는 이병철 회장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연수시절 양모 원료를 전공했다. 2년 연수를 마치고 귀국해서는 주경야독으로 경북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제일모직에서 9년 동안 일한 뒤 호주 이민을 결심했다. "호주 생활이 너무 즐거웠습니다. 공부도 재미있었지만 농장에서 양털을 깎고 캥거루 사냥을 다닌 일이 잊히지 않았습니다. 꿈 같은 날들이었죠. 고민 끝에 호주에서 꿈을 펼쳐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시 문 회장은 아내와 3명의 자녀가 있는 가장이었다. 아버지는 '넓은 땅에서 헤엄치고 다녀라'고 이민을 지지했다.
이민 수속을 밟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 시절 호주는 '백호주의'가 팽배했고, 우리 정부 관계자는 "호주 이민은 어렵다.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충고할 정도였다. 문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영주권을 얻기 위해 유학시절 실습했던 농장주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를 눈여겨봤던 농장주는 선뜻 재정보증을 해줬다. 문 회장이 가족과 함께 시드니에 도착한 1969년 12월, 그곳에 한국 교민은 겨우 10여 가구였다.
◆'낮에는 해보고, 밤에는 달보며'
시드니에서 첫 직장은 양모 수출업체인 'Black & Bare'였다. 사주가 유태인이었던 이 회사에서 8년 동안 일하면서 비즈니스에 대해 감을 잡았다. "호주에서 자리 잡는 과정이 럭키(lucky)했습니다. 1년 가운데 3분의 1은 비행기를 타고 일본, 대만, 홍콩, 한국 등지로 출장을 다녔습니다. 봉급도 꽤 받았습니다. 당시 연봉이 3만6천달러인데 이는 지방정부 장관보다 많은 금액이었죠. '즐거운 고생'이라고 할까요? 그때 쌓은 인맥들이 지금까지 사업하고 사회활동을 하는 데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병철 회장과 유태인 사장을 인생의 은인으로 꼽고 있다.
1978년 ㈜SunMoon을 설립했다. "회사 이름이 좀 특이하죠? '낮에는 해보고, 밤에는 달보며 열심히 일하자'는 의미로 상호를 정했습니다." 처음엔 한국의 섬유제품(원단'원사)을 수입해 호주에 판매하는 일을 했다. 다음엔 고무 제품을 한국에서 들여와 호주의 광산과 농장에 팔았다. 1990년대 초까지 회사의 매출은 연간 3천만 달러에 이르렀고, 직원도 26명이나 됐다. 현지에서 호스 제조업체도 운영하기도 했다.
"호주에서 이것저것 많은 사업을 벌였습니다. 엔지니어 출신이라서 사업에 대한 욕심이 많았죠. 아내(부인은 7년 전 사별) 말을 듣고 부동산 사업을 했으면 돈을 훨씬 많이 벌었을 것인데…. 조금 아쉽네요."(웃음)
문 회장은 요즘 사업규모를 줄이고 있다. 자신의 건물에 마련한 작은 사무실에서 현지인 비서 1명을 두고 무역업을 하고 있다. "이제는 나이도 있어 사업에선 은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하루를 3등분 해서 비즈니스 업무, 현지인 또는 교민과 교류, 골프 등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왕성한 사회활동
문 회장은 경상북도해외자문위원협의회 산파 역할을 했다. 그는 당시 이의근 경북도지사에게 자문위원협의회(당시 명예자문관협의회) 설립을 건의했고, 그 결과 2001년 10월 시드니에서 창립총회가 열렸다. 문 회장이 초대 회장을 맡았고 재임까지 했다. "세계 곳곳에 있는 자문위원들은 경북도의 해외주재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경북도는 전국 광역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자문위원 제도를 가장 잘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 김관용 도지사가 청와대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문 회장은 재호한인상공인연합회를 만드는 데도 앞장섰고 회장을 역임했다. 그가 건넨 이력서를 살펴보니 ▷밝은 사회 시드니클럽 초대 회장(1986) ▷호주 시드니 한인회 15대 회장(1987~88) ▷대양주 지역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 회장(1988~91) ▷시드니 한인 천주교회 사목회 총회장(1993~94) 등을 지낸 것으로 나타났다. 또 1981년에 대한민국 대통령 수출표창장과, 90년 평화통일 대통령 표창장도 받았다. 지난해는 모교인 대구공고가 주는 '자랑스런 대공인상'을 수상했다.
그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행복하다. 낯선 곳에서 사업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사람들과 끈끈한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옛날과 달리 인터넷으로 사업에 필요한 전 세계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라고 해도 인간관계는 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고 했다.
호주 시드니에서 글'사진 김교영기자 kim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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