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비유법이나 상징법을 써야 한다는 실증을 보인 작품이 많다. 고려 말부터 시조의 전형을 보여준 작품에서도 그런 사례가 있지만 정형시의 전형을 보여주는 한시에서는 더욱 시어의 간결함을 본다. 특히 비판적, 고발적, 풍자적, 상징적인 시문에서는 더욱 그런 예가 많다. 지방관의 가혹한 수탈로 인하여 농민의 생활이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던 시대적 상황과 민족적 현실을 여지없이 고발하고 있는 한시 작품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참새야 일년 농사 아랑곳하지 않고 어디 갔니
늙은 홀아비 혼자서 밭을 갈고 김맸건만
이렇게 먹어 치우다니 고생했던 벼와 기장
黃雀何方來去飛 一年農事不曾知
황작하방래거비 일년농사불증지
鰥翁獨自耕耘了 耗盡田中禾黍爲
환옹독자경운료 모진전중화서위
【한자와 어구】
黃雀: 참새, 누런 새/ 何方: 어느 곳/ 去飛: 날아가다/ 一年農事: 일년농사/ 不曾知: 일찍이 알지 못하고/ 鰥翁: 늙은 홀아버지/ 獨: 혼자/ 耕耘了: 밭을 갈고 김을 매다/ 耗盡: 1)줄거나 닳아서 다 없어짐, 2)'몹시'의 방언/ 田中禾黍: 밭 가운데 벼와 기장/ 爲: 하다, 여기선 '먹다'는 뜻임.
'벼와 기장을 모두 먹어 치우다니'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익제(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으로 고려 말의 문신이자 학자다. 만년인 1357년에 문하시중에 올랐으나 사직하고 학문과 저술에 몰두했다. '사리'(沙里)는 지방이라기보다는 농민들이 목이 쉬고 근심걱정하며 얻은 꽃, 곧 곡식이라는 뜻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참새야 어디에서 오고가며 날고 있는 것이냐/ 일년 농사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늙은 홀아비가 혼자 밭을 갈고 김맸는데/ 밭의 벼와 기장을 모두 먹어 치우다니'라고 번역된다.
궁핍한 나라 살림이나 외적 침입 여하에 따라서 백성들 생활상은 많이 달랐다. 부역을 해야 했고, 애써 지은 알곡식을 관(官)과 수탈자에게 바쳤다. 태평성세에도 지방관의 리더십에 따라서 지방민의 생활은 많은 희비가 엇갈렸다. 작자가 살았던 고려 말은 운둔과 피폐 생활의 연속이었다. 가혹한 수탈로 농민생활이 피폐해진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일구어진 작품이다.
위에서 참새는 무참하게 빼앗아가는 수탈자를 가리킨다. 수탈자는 땀 흘려 농사지은 농민들의 피폐함 자체를 자세히 알 리가 없다. 자기 뱃속을 채우기 위해 빼앗아 가면 그만이다. 늙은 홀아비는 농부를 지칭한다. 홀아비가 애써 지은 밭곡식을 먹어치우고 있으니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나이 연만한 분들은 6'25 때 겪었던 기억을 새롭게 한다. 야음을 틈타 갑자기 들이닥쳤던 인민군이 밥이며 쌀을 수탈해 가던 그때 그 일들이. 약탈의 분함을 삭혀가는 대목과 적절한 비유법을 구사하는 부분에서 많은 감동을 받는다.
이제현은 고려시대의 문신'학자로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301년(충렬왕 27년)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정승(右政丞)'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가 되고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 1353년 사직했다가 이듬해 우정승에 재임, 135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그 후 사직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1362년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청주(淸州)로 호종,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100여 년간에 걸친 무인(武人) 지배로 인한 후유증과 함께 원(元)의 정치적 간섭을 받던 시련의 시기에 그는 수차례에 걸쳐서 원을 왕래하기도 하고, 표문(表文)을 올려 원의 부당한 내정간섭을 비판하면서 고려의 주권을 보전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또 당대의 문장가로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했다. 경주의 귀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효행록'(孝行錄), '익재집'(益齋集), '익재난고'(益齋亂藁) 등이 있다.
장희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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