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퇴선 명령

배가 침몰 위기에 놓이면 선장은 위급 상황을 승무원과 승객에게 알려야 한다. 배를 구하기 힘든 상황일 경우 선장이 직접 '퇴선'(Abandon Ship) 명령을 내리는 게 원칙이다. 해양인명안전(SOLAS) 수칙에는 짧게 7번, 길게 1번 사이렌을 울려 비상 상황을 알리도록 규정했는데 신호 크기도 75㏈ 이상으로 되어 있다.

실제 상황에서 이런 수칙이 반드시 지켜질까. 작년 1월 이탈리아 질리오 항구 해상에서 좌초한 초대형 유람선 코스타 콩코르디아호가 좋은 사례다. 항로를 이탈해 운항하다 32명이 숨지는 참사였다. 당시 프란체스코 쉐티노 선장은 4천 명이 넘는 승객과 승무원의 안전 의무를 내팽개치고 먼저 배에서 탈출한 뒤 복귀 명령도 거부하다 법정에 선 상태다. 심지어 그는 사고 책임을 부하 직원에게 돌렸다. 엄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국제 여론이 들끓는 것도 안전 운항과 인명 구조의 최후 책임자라는 선장의 의무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반면 2009년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된 미국 화물선 매스크 앨라배마호 사건은 '선장은 배와 최후를 같이한다'는 상식이 지켜진 사례다. 당시 리처드 필립스 선장은 살해 위협에도 자청해 인질이 되고 배와 승무원을 먼저 구해 일약 영웅이 됐다.

파산 위기에 놓인 기업의 최고 경영자도 선장과 같은 역할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 최근 문제가 된 동양그룹 사태는 경영진이 법정관리 신청 직전까지도 위험성이 없다며 회사채와 기업어음을 판매하도록 기만했다. 법정관리 신청에 앞서 대여금고에 보관한 현금 등을 인출해 갔다는 의혹까지 받고 있다.

혼다자동차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의 일화다. 1972년 첫 출시된 '시빅'은 연비가 좋은 수랭식 엔진을 얹어 전 세계에서 히트를 쳤다. 하지만 높은 기술력을 화두로 계속 공랭식 엔진을 고집해온 혼다는 이듬해 경영 일선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최고 경영자로서 자신의 중대한 판단 실수에 책임진 것이다. '경영의 신'으로 불린 마쓰시타 고노스케도 철저히 계산하는 냉혹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 때문에 생전에 '비열하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하지만 마쓰시타에게 정말 비열한 경영자는 누구일까. '냉철한 판단을 못 해 경영에 실패하고 사원들을 길바닥으로 내모는 사람'이다. 투자자와 직원에게 큰 고통을 안기고도 악어의 눈물만 흘린 동양 경영진과 콩코르디아호 선장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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