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야 잘 지낸다. 오늘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나. 다만 한 가지, 끈 못 붙인 우리 막내가 걱정이지."
어머니는 지난주 통화했을 때와 똑같은 얘기를 했다. 막내가 최근에 작은 수술을 하나 한 탓에 걱정이 더 깊어졌다.
"지금이야 다 늙은 어미라도 있다지만, 어미마저 죽고 나면 우리 막내, 불쌍해서 어쩌나."
"언니도 있고 오빠도 있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언니 오빠 있어봤자 자기네 가정이 우선이지. 나 죽고 나면 걔는 천지간에 달랑 제 한 몸뿐인걸."
내가 아무리 언니 노릇을 잘하겠다고 약속해도, 늘 바쁜 데다 천성이 무심한 나를 잘 아는 어머니가 안심할 리 없었다. 작전을 바꿨다. 요즘 주변에 널린 게 싱글이라고, 네 가구 중 한 가구가 '나 홀로 가구'라고, 막내의 싱글 라이프는 무척 보편적인 현상임을 역설했다. 어머니는 일단 수긍했다.
"우리 친구들 집에도 늦게까지 시집 장가 못 간 자식들이 수두룩하긴 해."
때를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나이 먹었다고 아무나 붙들어서 결혼했다가 혹시 잘못돼 봐요. 그게 더 문제야. 워낙 흉흉한 세상이잖아요. 처갓집 식구들까지 못 살게 하는 놈들도 많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수화기 너머에서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리라는 짐작은 착각에 불과했다.
"그래도 가족이 있어서 식탁에 둘러앉아 밥도 먹고 얘기도 하면서 오순도순 살아야지. 언제까지나 혼자 먹고 혼자 자고 무슨 재미가 있겠냐?"
문득 영화 '은교'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늙은 시인이 홀로 국그릇에 밥 두어 덩이를 말아 꾸역꾸역 삼키는, 무섭도록 고적하던 장면.
'양로원에 가면 되지'라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20여 년 뒤, 직장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난 뒤에도 막내는 팔팔할 것이다. 좀 더 사생활이 보장되면서 좀 더 친밀감을 느낄 만한 공동체, 문화생활과 일상생활을 따로 또 같이 할 공동체가 필요하다.
"모여 살면 되죠."
"누구랑?"
"엄마도 아는 제 친구들, 아무개랑 아무개, 그리고 아무개 있잖아요."
대학시절에 한집에서 자취하고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 솔로도 있고 돌아온 싱글도 있고 그렇다.
"나중에 모여 살 거랬어요. 우리 막내, 거기 끼워달라고 할게요."
"끼워줄까?"
"그럼요."
어머니는 그제야 안심했다.
그렇다. 모여 사는 게 대안이다. 우리는 탈속한 수행자가 아니고 뼛속까지 외로움을 타는 중생이다. 같이 밥 먹고 웃고 놀러다니고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직업도 다양하고 일상의 흥미 분야도 다양하지만, 남의 취향과 개성을 존중하고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원칙만은 한결같은 내 친구들. 재봉질을 잘하고 여행과 영화를 좋아하는 유치원 교사인 우리 막내는 내 친구들과 함께 인생의 황혼녘을 보다 따스하게 보낼 수 있을 거다.
'맥도날드 할머니'가 지난 7월, 말기암으로 사망하여 무연고 추모의 집에 안치되었다는 소식이 뒤늦게 기사화되었다. 원조 된장녀의 죽음 앞에 명복을 빌 필요가 있는가, 너희 잘난 골드 미스의 최후는 바로 저런 거다, 등등의 험한 댓글들을 스크롤하며 가슴이 답답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맥도날드 할머니는 독특한 개인이었을 뿐, 오늘날 급증하는 싱글족의 현재도 아니요 미래도 아니다. 다만, 이 시점에 다른 노후를 상상하고 준비해야 할 하나의 계기는 될 수 있다.
박정애/강원대교수·스토리텔링학과 pja83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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