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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의 시와 함께] 오므린 것들-유홍준(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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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밭에는 배추가 배춧잎을 오므리고 있다

산비알에는 나뭇잎이 나뭇잎을 오므리고 있다

웅덩이에는 오리가 오리를 오므리고 있다

오므린 것들은 안타깝고 애처로워

나는 나를 오므린다

나는 나를 오므린다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내가 내 가슴을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내가 내 입을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담벼락 밑에는 노인들이 오므라져 있다

담벼락 밑에는 신발들이 오므라져 있다

오므린 것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

숟가락은 제 몸을 오므려 밥을 뜨고

밥그릇은 제 몸을 오므려 밥을 받는다

오래 전 손가락이 오므라져 나는 죄 짓지 않은 적이 있다

월간《현대시》(2012년 12월호)

'오므리다'라는 몸말은 평화적이다. 작고 여린 생명들은 위협이 닥쳤을 때 자신을 오므린다. 새끼들이 있으면 품 안에 오므린다. 가히 필사적이다. 사람을 비롯한 생명체들의 몸말은 같은가 보다. 특히 약한 존재일수록 오므리는 정도가 강력하다.

남에게 적선을 바라거나 베푸는 것을 받을 때는 손을 오므리고 조아린다. 갚음을 전제로 빌릴 때는 손을 벌린다. 남에게 무언가를 빼앗을 때도 손을 벌리고 요구한다. '벌리다'라는 몸말에 비해 '오므리다'는 착하고 슬프다. 몸을 오므리고 손을 오므려서 대저 무슨 죄를 짓겠는가.

유홍준 시인의 주특기인 '상형 문자'가 빛나는 시다. 형상을 보고 삶의 숨결을 집어내는 솜씨가 참으로 유감없다. 그가 마지막 행에서 고백했다시피 손을 오므린 경험이 없이는 불가능한 시다.

입동이다. 바야흐로 하늘이 지상에 한껏 풀어놓았던 생명들을 오므리고 있는 시간이다.

시인 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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