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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남는 것을 모자란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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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쾌히 행복을 누려야 할 순간, 그것을 빼앗는 훼방꾼은 바깥에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발견될 때가 있다.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가을걷이 끝난 텅 빈 들판처럼 허허로울 때가 있다. 종교마저 내면의 부요(富饒)를 잃어버리고 허둥대는 것을 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아, 미안합니다."

문을 열고 나오다 마주친 전단 돌리는 사람의 말이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다. 전단 뭉치를 옆구리에 끼고 내 앞에서 어쩔 줄 몰라했다. 잠시 머뭇거리다 후다닥 뒤돌아 내려간다. 어떤 말이라도 한마디 해야겠기에 그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학생, 그 전단 다 주세요."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 고개를 숙이고만 있다.

"학생, 뭐가 미안해요. 열심히 일하는 모습 참 보기가 좋구먼.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다 줘 봐요."

빼앗다시피 달라는 요구에 옆구리에 낀 종이 전단을 마지못해 내게 건넸다. 전단을 들고 집으로 가져갔다. 그다음은… 비밀이다.

오래전, 군대를 막 제대하고 잠시 집에서 쉴 때였다. 뭐라도 해야 했기에 벽보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훤한 대낮에 담벼락과 전봇대에 벽보를 붙이는 일이 내게는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교회는 만만하다 싶어 어느 교회 담벼락에 벽보를 붙이게 되었다. 잠시 후, 교회 안에서 나온 한 여자 분에게 발각됐다. 다짜고짜 호통을 치는데 눈물이 날 정도로 혼쭐이 났다. 길가는 사람 앞에서, 마치 도둑이라도 된 듯 추궁을 당했다.

오늘 왜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나는 걸까. 어떤 경우이든 교회를 한 번이라도 찾는 모든 이는 무엇인가에 목말라서다. 사랑에, 정에, 돈에…, 이때 교회는 무엇이든지 넉넉히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른바 '개척교회'라고 불리는, 도시의 변두리 작은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다. 교회! 자칫 민감한 부분일 수 있지만 내가 목사이기에, 또 나 역시 포함되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교회는 사회적인 책임을 결코 피해갈 수 없다. 존재 목적을 잃어버리면 신앙도, 사명도 다 잃는다. 이 사회가 동네마다 우뚝 선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사회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장욕은 자본주의 사회의 당연한 본능이라지만 몸집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면 부작용을 부른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이 사회가 앞다투어 '물질화' '대형화'를 부추기고 있다지만 종교마저 이에 동참하고 있는 듯하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가치를 값진 것으로 여겨야 할 이들, 성스러운 신의 뜨락을 삶의 디딤돌로 여기며 산다고 하는 이들이 바로 코앞의 경제적 성과물에 아등바등한다면, 속인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디 교회뿐인가. 눈에 보이는 것마다 역주행하고 있다. 병원이 늘어날수록 앓는 사람들은 더 늘어나고, 법조인들이 많아질수록 범법자는 더 많아지고, 우리를 편리하게 하는 기기들이 앞다투어 출현하지만 세상 살기는 오히려 더 빠듯하고 바빠졌다.

일방적으로 독주하는 힘의 세계에서 뒤처진 자들, 찬바람 부는 뒷골목 쓰레기 더미에서 종이 박스를 줍는 할머니들, 전단을 돌리고 붙여야 먹고사는 작은 자들의 얼굴빛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이제 이들을 위해 비대해진 체중을 적당히 조절해야 할 때다. 남는 것을 모자란 곳에 조금씩만 흘려보내면 된다. 따뜻한 미소 한 번이라도 좋다. 추운 겨울 파지 줍는 할머니의 얼음 같은 손을 한 번 잡아줘도 좋다. 돈으로 사람의 값을 매기는 세상에서 죄인처럼 숨어서 전단 돌리는 학생의 어깨 한 번 토닥여도 좋다. 겨울 초입에 더 절실해지는 생각이다.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전단을 든 청년이 골목 끝으로 사라진다. 그의 축 처진 어깨 위에 20여 년 전, 한 청년의 설움이 알알이 서려 있다. 부디 오늘만큼은 집주인들에게 들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혹여, 괴팍한 주인을 만나서 혼쭐나더라도 나처럼 상처받지 말았으면 좋겠다. 꼭 성공했으면 좋겠다.

이상렬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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