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초대받은 불청객

섬사람에게 소갈비 내놓고 갈치'삼치'고등어 구이 대접받아

하의도엘 가보고 싶었다. 여러 가지 여건이 허락지 않아 문전에서 번번이 놓치고 말았다. 출발하기 전 여행 도반들과 행선지를 정하면서 맨 먼저 하의도를 띄워보았다. 찬성과 반대가 반반쯤 되었다. 이럴 땐 의사봉을 쥔 사람이 선수를 치는 게 상책이다. 첫날은 하의도로 들어가 1박 한 다음 나머지 이틀은 격포로 올라가 대명리조트에서 산행, 요리, 휴식을 동시에 즐기기로 했다.

리조트 예약 둘째 날이 마침 '10월의 마지막 밤'이어서 멈칫거리며 뒷걸음치고 있는 청춘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약간은 상기되는 그런 기분이었다. 첫날 아침 7시에 출발하여 아침밥을 고속도로 휴게소 퍼걸러 밑에서 갖고 온 찰밥말이로 때웠다. 점심밥도 목포항 정기여객선터미널 옆 한갓진 구석에서 먹다 남은 밥으로 간단하게 요기했다.

오후 1시 40분에 목포를 출발하여 복호, 자라, 장산, 옥도, 장병을 거쳐 하의도로 들어가는 예정에 없던 조양페리호를 탈 수 있었다. 우리는 두 끼 밥값과 시간을 벌어 그야말로 일석이조를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웠다. 도반들의 특기인 '들이대고 보는 막무가내 기질'이 여기서도 용케 통한 것이다.

여름이 떠나고 난 바다는 텅 비어 있었다. 여객선의 삼등 선실을 타면 부대끼며 고함지르고 풍랑이 심할 땐 울고불고 토하는 것을 보는 것이 재미인데 즐길 거리가 너무 없었다. 이럴 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술자리를 펴는 일이다. 와인 한 병을 꺼내 '센베이' 과자를 안주로 씹었다. 뭉게구름 몇 점이 떠있는 가을 바다는 지아비 없는 과붓집처럼 조용하고 쓸쓸했다.

장산도쯤인가 낚시꾼으로 보이는 50대 남녀 세 사람이 선실로 들어와 옆자리에 앉았다. 인사 대신 먹고 있던 과자 한 주먹을 내밀었더니 나이가 적은 이가 매점으로 내려가 소주 두 병을 사왔다. 술은 그야말로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없어졌다. 도반 중의 한 사람이 소주, 맥주를 다섯 병 사와 '실컷 잡수시라'며 안겨주었다.

하의도에 살고 있는 형제분과 동행한 여성은 동생의 부인이었다. 통성명이 끝나고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민박집 사정과 가볼 만한 정보가 묻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챙겨졌다. 형인 송대현(59) 씨는 "아직 해가 떨어지기 전이니까 서쪽 끝에 있는 큰 바위 얼굴을 비롯하여 섬 일주 안내를 하겠다"고 자청했다. 우리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숙소는 형이 소개한 황소 민박(061-275-4280)으로 정한 다음 앞차를 따라다니기로 했다. 동생 내외는 16년 전에 이 섬에 정착했으며 형은 염전을 해볼 요량으로 충청도에서 가족을 떠나 올여름에 혼자 왔다고 했다. 우선 염전 구경부터 시켜 주었다. 창고 한편에 쌓아둔 소금이 정미소에서 갓 찧은 쌀처럼 희고 고왔다. 우린 당장 그 자리에서 20㎏짜리 12포(포대당 1만6천원)를 주문하고 노을 속에 졸고 있는 저녁 바다를 실컷 구경했다.

설악과 오대산 쪽의 단풍은 벌써 지고 있다는데 이곳 하의도는 남쪽이어서 산야의 초목들이 '초록에 지치지 말자'며 결의를 한 것처럼 굳센 의지로 푸르름을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무의 의지는 연예인들의 보톡스 맞은 얼굴처럼 세월 앞에는 결국 무릎을 꿇고 말지니 오호 불쌍해라.

그들은 우리를 민박집까지 데려다 주고는 할 일 다 한 것처럼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들의 트럭에는 낚시로 잡은 싱싱한 갈치와 삼치, 그리고 고등어까지 들어 있는 걸 얼핏 본 적이 있는데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긴급회의가 열렸다. 우리가 가져온 양념 소갈비를 통째로 들고 가서 갈치구이에 곁들여 저녁밥을 얻어먹자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출동! 잠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아까 뵙고 또 뵙습니다." 두 형제분도 우리의 뜻을 얼른 알아차리고는 "잘 오셨습니다. 올라오시지요" 하고 반겨 주었다. 그다음부터 지휘봉은 우리가 거머쥐었다. "구이 판에 스위치 꽂고 아지매는 갈치와 삼치를 썰어 오고 고등어는 통째로 올리소, 섬사람들은 갈비 잡숫고 육지 사람들은 생선구이나 먹읍시다." 한바탕 부산을 떨고 나니 상이 그득해졌다.

그 집 안주인(정홍자 씨'50)의 솜씨가 대단했다. 채마밭에서 뜯어온 쑥갓의 향과 날된장 맛이 얼마나 좋던지 갈치가 다 익기 전에 홀라당 먹어 치웠다. 내 평생에 저녁밥 대신 갈치구이만 먹은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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