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엔 작업실을 하나 마련해야겠다
눈 내리는 밤길 달려갈 사나이처럼
따뜻하고 맞춤한 악수의 체온을-
무슨 무슨 오피스텔 몇 호가 아니라
어디 어디 원룸 몇 층이 아니라
비 듣는 연립주택 지하 몇 호가 아니라
저 별빛 속에 조금 더 뒤 어둠 속에
허공의 햇살 속에 불멸의 외침 속에
당신의 속삭임 속에 다시 피는 꽃잎 속에
막차의 운전수 등 뒤에 임진강변 초병의 졸음 속에
참죽나무 가지 끝에 광장의 입맞춤 속에
피뢰침의 뒷주머니에 등굣길 뽑기장수의 연탄불 속에
나의 작은 책상을 하나 놓아두어야겠다
지우개똥 수북이 주변은 너저분하고
나는 외롭게 긴 글을 한 편 써야겠다
세상의 그늘에 기름을 부어야겠다
불을 지펴야겠다
아름다운 가을날 나는 새로운 안식처에서 그렇게
의미 있는 일을 한번 해야겠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서설이 내리기 전 하나의 방을 마련해야겠다
-시집 『불을 지펴야겠다』(문학동네, 2009)
내 청소년기는 막무가내의 가난과 불화, 가족의 해체로 암울하기만 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그 시절 내 손을 잡아준 것은 시 한 편이었다. 그 시는 내 손을 잡고 같이 울어주었다. 같이 꿈도 꾸면서 어떻게든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건너가 보자고 나를 부추기기도 했다. 단순한 위로의 차원이 아니었다. 급기야는 자신을 닮은 시를 써보라고 은근히 압력을 넣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끼적이기 시작한 게 여태까지다.
시에 큰 은혜를 입었다. 지금까지도 나를 지탱해주고 있다. 시력 사반세기가 넘었다. 작금에 이르러서 드는 생각, 나도 그런 시 한 편 정도는 세상에 돌려주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는 것이다. 우선, 좀 더, 그 시절의 나처럼이나 어둡고 낮고 춥고 축축한 곳에 있는 존재들에게 비집고 들어가야겠다. 이 시처럼 그들 안에 마련한 '작업실'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외롭게 긴 글을 한 편 써야겠다"고 마음을 낸다. 겨우내 불을 지피려면 땔감도 구해 놓아야겠다. 더 추워지기 전에.
시인 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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