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명은 데뷔곡의 인기에 힘입어 레코드사의 섭외로 방송출연까지 했습니다. 1940년 2월 10일 경성방송국(JODK) 제2방송의 오후 8시 40분 프로에 출연하여 데뷔곡과 함께 '여로인생''청춘문답' 등 6곡을 경성방송국관현악단 반주에 맞춰서 불렀습니다.
가수 김봉명은 일제 말 빅타레코드사에서 9곡, 해방 후에 2곡을 취입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식민지시절 김봉명의 데뷔곡은 1939년 3월에 발표한 '깨여진 단심'이고, 마지막 곡은 1941년 4월의 '파랑새 우는 언덕'입니다. 다음에 살펴볼 노래는 '뻐국새 우는 주막'입니다. 이 작품의 가사를 읽다보면 1절 셋째 줄의 '지나친 주막마다 눈물뿌린 베개 맡에'란 대목에 눈길이 머뭅니다. 시인 백석(白石'1912∼1995)이 1938년 3월 '조광'(朝光)지에 발표한 시 '산숙'(山宿)의 느낌과 어찌 그리도 비슷한지요. 산골 여인숙 방안에 떼굴떼굴 굴러다니는 목침에 반들반들 기름때를 묻히고 간 무수한 떠돌이 민초들의 아프고 시린 사연들이 떠오릅니다. 그들은 국내의 이곳저곳을 살길 찾아 헤매 다녔을 것입니다. 시인은 그 산골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윗목에 놓인 낡은 국수 분틀과 방안에 까맣게 기름때로 절어 있는 목침들, 그리고 그 목침을 베고 이 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떠났던 무수한 민초들의 고달픈 삶의 내력을 생각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용모와 생업, 삶의 서러웠던 이유까지도 낱낱이 떠올리고 있지요. 가요곡 '뻐꾹새 우는 주막'의 작사자 화산월(華山月)은 이부풍(李扶風'본명 박노홍'1914∼1982)의 또 다른 필명입니다.
시들픈 가랑비가 창호지를 흔들고/ 때 묻은 옷소매에 꽃 보라가 덮인다
지나친 주막마다 눈물뿌린 베개 맡에/ 밤새며 울려주던 뻐꾹새가 그립다
-'뻐꾹새 우는 주막' 1절
가수 김봉명이 대외활동을 그리 활발하게 한 기록은 없으나 1940년 8월 서울 부민관 강당에서 열렸던 작사가 왕평의 추도극, 추모공연 무대에 김용환, 송달협 등 빅타 가수들과 함께 출연했습니다.
1942년 10월 9일에는 제일악극대(第一樂劇隊)란 단체를 조직하여 실무를 맡았습니다. 김봉명은 악극단 운영의 경험을 되살려서 8'15 해방 이후 서라벌악극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통솔하면서 악극 작사가 박두환이 대본을 쓴 악극 '울며 헤어진 부산항'으로 대중들의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악극 '아리랑 술집'에는 김미라, 김미선 등과 자신이 직접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이 악극에서 김봉명은 대표곡 '아리랑 술집'을 멋지게 불러 관객들의 큰 호응과 갈채를 받았습니다. 이날 함께 연기했던 김미라는 '눈물의 여왕'으로 불리던 전옥과는 또 다른 스타일의 신파조 순정 여배우였는데 그녀와 사랑의 불이 붙어서 마침내 부부가 되었지요. 김봉명은 악극계의 경험이 많은 대중연예인으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며 악극의 기세가 거의 쇠퇴한 1960년대까지도 악극활동의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1984년은 김봉명의 나이 67세가 되던 무렵입니다. 그해 가을, 패티김을 비롯한 후배가수들은 힘겹게 살아가는 원로가수 돕기의 일환으로 공연을 열었고, 많은 가수들이 여기에 참가했습니다. 1990년 여름에는 KBS의 가요무대 프로가 특집으로 제작한 '악극단의 노래'에 출연하여 악극단 시절을 회고하면서 노래도 불렀습니다. 김봉명은 2005년 88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한국인의 삶이 가장 힘겨웠던 식민지 시대 후반기, 구수하고 정겨운 특유의 저음으로 부른 '아리랑 술집' 한 곡으로 민족의 쓰라린 가슴을 위로하고 격려를 보내주었던 가수 김봉명의 생애와 그 발자취를 곰곰이 떠올려봅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野, '피고인 대통령 당선 시 재판 중지' 법 개정 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