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떼먹은 술값 팔순상으로 갚을게요"

"넉넉한 인심 잊을 수 없어" 학생들 보은의 행사 열어

곡주사 이모 정옥순(앞줄 오른쪽 세 번째) 씨를 위해 그때의
곡주사 이모 정옥순(앞줄 오른쪽 세 번째) 씨를 위해 그때의 '학생'들이 팔순잔치를 열었다. 정 씨의 오른쪽 시계 반대 방향으로 이창주 전 영천농민회 회장, 장세룡 대구경북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 변대근 5'18민중항쟁대구경북동지회 사무국장, 이우백 바이칼경영철학아카데미 대표, 석원호 경북대 철학과 강사, 박재빈 대구경북희망문화포럼 기획위원, 류재복 목사, 김기수 마을기업 농부장터 대표, 김학기 전 청와대 행정관, 이상술 5'18민중항쟁대구경북동지회 회장, 함종호 4'9인혁재단 부이사장, 이태선 씨(정 씨 친구)

21일 오후 6시 대구 수성구 황금동의 한 음식점. 이모로 불리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자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인 '이모'는 대구시 중구 반월당 염매시장 뒷골목에서 대폿집으로 30여 년 동안 사랑을 받았던 '곡주사'의 주인 정옥순 씨. 이모의 말에 박수로 화답을 한 중'장년 50여 명은 1970, 80년대 뻔질나게 곡주사를 드나들었던 경북대'계명대'대구대'영남대의 운동권 학생들이다. 대학생들은 곡주사 주인을 이모라 불렀고, 이모는 허기진 학생들에게 술 먹기 전 콩나물국에 밥을 말아 주곤 했다.

이날 '학생'들은 올해 여든인 정 씨의 팔순잔치를 열어주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마흔에서 예순을 넘긴 다양한 연령대로 대구와 경북 등에서 모인 것이다. 정 씨의 팔순잔치 첫 계획은 지난해 11월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의 '내가 내게 묻다' 출판기념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신의 이야기가 포함돼 그 자리에 참석한 정 씨는 "내 손으로 찹쌀 동동주를 빚어 한 사발씩 돌리고, 학생들이 맛있게 먹고 좋아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고 이날의 팔순 잔치로 이어진 것이다.

당시 곡주사는 유신과 신군부로 이어지던 암울한 시대 울분에 찬 학생들의 광장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울 곡(哭), 술 주(酒), 선비 사(士)' 또는 '울 곡(哭), 저주할 주(呪), 선비 사(士)'로 불린 기개 있는 곡주사의 이름은 처음부터 지어진 게 아니다. 염매시장 주변 식당을 오가던 학생들이 곡주사라 부른 것을 몇몇 학생이 종이로 써 붙였고 이를 운동권 학생들이 시대적인 상황에 맞춰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곡주사가 오랜 기간 이름값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곡주사의 지킴이 정 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세룡 대구경북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은 "이모가 곡주사 입구에 앉아 전을 부치며 반기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정겹다"고 했다.

김찬수(대구경북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상임이사) 씨의 사회로 시작된 팔순잔치는 김용락 시인의 '곡주사' 축시 낭독과 덕담이 오가는 가운데 간간이 찔레꽃, 아침이슬, 사나이 등 그 시절 많이 불렸던 노래로 흥겹게 이어졌다. 이모에게는 십시일반으로 모은 축하금이 주어졌고 이창주 전 영천농민회 회장은 황금 열쇠를, 이우백 바이칼경영철학아카데미 대표는 건강식품, 남영주 전 총리실 민정수석은 상품권 등을 전달했다. 또 일부는 외상값이라며 정성이 담긴 선물을 전달해 웃음을 자아냈다. 지금은 불태워 없앴지만 곡주사에는 학생들의 외상 장부만 7권, 손목시계'학생증 박스 3개가 있었다고 한다.

함종호 4'9인혁재단 부이사장은 "민주주의가 질식하던 어두운 시대에 곡주사는 우리들의 도시 속 피난처였다"며 "학생들에게 이모는 인간의 정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줬고 오늘 팔순잔치에 가족처럼 우리가 모인 것은 이모로부터 배운 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평생을 곡주사 이모로 살아온 정 씨는 곡주사 운영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현재 반지하 단칸방에서 홀로 지내고 있다.

이석수기자 ssl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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