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서각의 시와 함께] 전갈-류인서(1960~ )

봉투를 열자 전갈이 기어나왔다

나는 전갈에 물렸다

소식에 물렸다

전갈이라는 소식에 물렸다

그로부터 나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빙그레 웃곤 하였다

축축한 그늘 속 아기버섯도 웃었다 곰팡이들도 따라 웃었다

근사하고 잘 생긴 한 소식에 물려 내 몸이 붓고 열에 들떠 끙끙 앓고 있으니

아무튼, 당신이 내게 등이 푸른 지독한 전갈을 보냈으니

그 봉투를 그득 채울 답을 가져오라 했음을 알겠다

긴 여름을 다 허비해서라도

사루비아 씨앗을 담아오라 했음을 알겠다

- 시집 『여우』, 문학동네, 2009

편지를 받았는데 봉투 속에서 전갈이 나왔다니 다소 낯설 수도 있겠다. 더구나 그 전갈에 물렸다니. 류인서 시에 다가가기 위해 우리는 일상의 어법에서 벗어나 시인의 감각을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전갈은 중의적이다. 독이 있는 절지동물 전갈의 의미와 전하는 말이나 안부라는 의미가 그것이다. 편지는 아마 연서(戀書)일 것이다.

사랑을 해본 이는 알 것이다. 연모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이 담긴 연서를 받았을 때 온몸을 통해 퍼지는 달콤한 아픔 말이다. 시인은 그런 느낌을 전갈에 물린 것 같은 강렬한 감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누군가 사랑을 커피처럼 쓰고 지옥처럼 뜨겁다고 했던가.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사랑이 그냥 달콤한 것만이 아니라 아프기도 하다는 것을. 이 시 '전갈'을 조곤조곤 읽어 내려가면 몸속 깊이 감추어져 있던 첫사랑의 미세한 감각들이 다시금 세포를 반짝이며 깨어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종이에 연서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종이에 손 글씨로 편지를 써서 빨간 우체통에 넣고 답신이 오기를 기다리던 시절은 갔다. 아직도 길가에 그대로 서 있는 우체통이 쓸쓸해 보인다. 그를 위해서 오랜만에 편지를 쓰는 것도 잃어버린 나를 찾는 길이 될지도 모르겠다.

시인 kweon51@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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