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에게 우리나라 산하는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였다. 한반도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스케일 감각으로 고속도로와 제철소, 조선소 등을 그려나갔다. 이 과정에서 박 대통령이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은 철저한 현장 확인이었다. 대통령이 직접 현장을 찾아 문제점을 찾아내고 해결 방안을 도출해냈던 것이다.
◆현장에서 본질에 접근
포병 출신인 박 대통령이 가장 싫어한 것이 주먹구구식이었다. 조국 근대화 작업의 행동 철학이 되는 박정희식(式) 일 처리 핵심은 업무의 본질에 구체적으로 접근하는 것이었다. 숫자에 대한 기억력이 남달랐던 박 대통령은 현장을 누비며 그 속에서 국가 발전의 가속도를 높였다.
현장을 중시한 박 대통령의 업무 스타일은 그가 정권을 잡은 초기부터 자리를 잡았다. 1961년 12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미국의 한국 원조 기관인 유솜(USOM'미국의 대외 원조 기관'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 처장 킬렌을 울산 여행에 동행하도록 초청했다. 박 의장은 울산에 도착하자마자 지금의 공업단지가 있는 태화강변으로 향했다. 마침 내린 눈으로 뒤덮인 황량한 벌판에 군데군데 말뚝이 세워져 있었다.
박 의장은 먼저 킬렌에게 "우리는 여기에 종합제철공장, 비료공장, 정유공장 등 기간 산업체를 건설할 작정이오. 미국이 우리를 도와주시오"라고 했다. 그리고 박 의장은 동행한 이병철 삼성 회장을 향해 이렇게 얘기했다. "이제부터 돈을 번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할 일이 있소. 정부가 추진하는 조국의 근대화 작업에 여러분이 적극 협력해 주어야겠소."
이렇게 해서 군사정부가 첫 경제개발 사업으로 착수한 것이 울산공업단지 조성이었다. 1962년 2월 울산공업지구 설정식에 참석한 박 의장은 결연한 표정으로 경제개발 의지를 피력했다. "4천 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민족 숙원인 부귀를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곳 울산을 찾아 여기에 신생 공업도시를 건설하기로 하였습니다. 루르의 기적을 초월하고 신라의 영성(榮盛)을 재현하려는 이 민족적 욕구를 이곳 울산에서 실현하려는 것이니, 이것은 민족 재흥(再興)의 터전을 닦는 것이며, 국가 백년대계의 보고(寶庫)를 마련하는 것이며, 자손만대의 번영을 약속하는 민족적 궐기인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울산공업단지는 2008년 780억달러의 수출을 올려 세계 최대의 공업도시로 팽창했다.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기폭제가 된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도 박 대통령이 자주 찾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 참여자의 회고. "박 대통령은 5만분의 1 지도에다 서울부터 부산까지 연필로 노선을 직접 그려가며 일일이 지시를 내렸죠. 지형의 높낮이에 따라 노선을 설계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지요. 박 대통령은 절대 현장에 그냥 오는 법이 없었어요. 항상 점퍼나 격려금 같은 선물을 가져와 직원들의 사기를 높여주곤 했지요. 이런 것들이 우리가 미치도록 일하게 만든 힘이 되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를 닦을 때 박 대통령을 보좌했던 한 기술자의 이야기도 현장을 중시한 대통령의 열정을 웅변하고 있다. "나는 박 대통령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지휘봉은 타고 다니던 헬리콥터였다. 그는 헬리콥터를 타고 올랐다 내렸다를 되풀이했다. 어느 날은 지질학자들을 태우고 현장에 와서 왜 터널 공사를 하는데 산사태가 났는가를 묻고, 다른 날엔 유엔의 수리(水理)학자들을 데리고 나타나서 왜 우리 기술진이 수량 자료를 잘못 계산했는지 따졌다. 화요일에 해답이 나오지 않으면 그는 목요일에 또 나타났다."
◆모내기'벼 베기 거르지 않아
박 대통령은 집권 18년 동안 모내기'벼 베기를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월남전 참전국 가운데 최초로 월남 전선을 방문한 국가 지도자도 박 대통령이었다.
해다마 정초가 되면 박 대통령은 각 부처와 지방 관서를 시찰했다. 이때 각 부처 및 지방 관서에서는 지난해의 실적과 금년도의 사업 계획에 대해 보고를 했다. 각국 담당 국장이 자기 소관에 대해 브리핑하는 게 보고 양식이었다. 국별로 하게 되니 박 대통령으로서는 상세한 내용까지 파악하고 점검할 수 있고, 각 부서의 능력까지도 평가하게 됐다. 국장으로서는 이 브리핑 때 자기 소신을 밝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대통령비서실 경제 2수석비서관을 지낸 오원철이 쓴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의 한 대목. "당시 상공부 공업국장이었던 나는 1965년 박 대통령의 초도순시 때를 이용해서 '석유화학 건설'에 대한 건의를 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로 '석유화학 건설'의 계기가 됐다. 또한 박 대통령은 지방 관서 순시를 이용해서 그 지방에 있는 공장이나 기술자 양성 기관을 시찰했다. 그리고 점심에는 지방 유지를 불러 식사를 함께 했는데, 이때 지방 유지들은 지방 경제발전을 위해 공업단지 건설 등 여러 방면의 건의를 했다. 박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은 전국과 전 분야를 모두 커버하는 철저한 '실무 확인 행정'이었다."
수출에서도 박 대통령은 현장 확인에 힘을 쏟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수출진흥확대회의. 박 대통령은 매월 열리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중심으로 수출 진흥을 위한 종합 시책을 추진했다. 이 회의에는 대통령 이하 관계 장관, 경제단체장, 금융기관장, 우량기업체 대표, 대학교수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상공부장관이 품목별 수출 실적과 계획, 그리고 문제점을 보고한 뒤 토론을 벌였다. 박 대통령은 재임 기간 18년 가운데 14년간 135차례나 참석해 회의를 주재했다.
수출진흥확대회의는 1966년부터 시작해 해외시장의 수출 정보를 수집함은 물론 KOTRA 및 모든 재외공관의 외교관들을 수출시장에 투입하고 상황을 점검했다. 또한 우수 수출 기업과 기업인을 선정하여 표창했다. 그 결과 1967년에 3억달러를 돌파한 수출 실적이 1970년 말 10억달러, 1977년에 100억달러를 돌파하고 수출 주도 정책을 편 지 50년 만인 2011년 세계에서 8개국뿐인 무역 1조달러 클럽에 대한민국의 이름을 새겨 올렸다. 이와 병행하여 경제기획원에서 주관하는 월간 경제동향보고회에도 박 대통령은 서거 전까지 빠짐없이 참석, 경제를 챙겼다.
박 대통령이 손수 키웠던 '과학기술의 집현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도 그의 발자취가 깃들어 있다. KIST 초대 소장과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낸 최형섭 박사의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한 대목. "나는 KIST가 자리를 잡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박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설립 후 3년 동안 적어도 한 달에 두 번씩은 꼭 연구소를 방문해 연구원들과 대화를 나눠 연구소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 주었고, 건설 현장에 직접 나와 인부들에게 금일봉을 주는 등 각별한 신경을 써주었다. 그리고 장관들의 반대에 부딪힐 때마다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국가원수가 자주 연구소에 들른다는 것이 미치는 영향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컸다. 연구소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의 사기가 극도로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연구소를 지원하는 정부 관리의 사고나 행동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 덕분에 대한민국은 폭발적인 과학기술 인재 양성 기록을 세웠고 원자력과 통신, 반도체 분야의 집중 육성으로 이어져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게 됐다.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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