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좋은생각 행복편지] 천천히 천천히 슬로 슬로

벌써 3월이 다가오네요. 나이가 들면 그 나이만큼 인생의 속도도 빨라진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군요. 나이 30이면 30㎞로 가는 것 같고, 40이면 40㎞로 가는 것 같다던데 요즘 생각해보면 그 두 배의 속도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네요. 하긴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온통 빠른 것투성이잖아요. 기차는 처음 달렸던 속도의 몇 배로 빨라져서, 서울과 대구 간 거리를 2시간 이내로 좁혀놨잖아요. 고속도로를 씽씽 달리는 자동차들과 세계 어디든 가고 싶은 나라로 당장 떠날 수 있는 비행기들.

세상도 빨라지고 세월도 빨라졌는데 인생도 빨라지다니, 이 속도를 어떻게 따라갈지 갈수록 점점 막막해지는군요. 그래서인가요? 몇 년 전부터 여러 방면에서 이는 '슬로 라이프'(Slow Life) 운동에 관심이 가더군요. 얼마 전 지나간 책을 뒤적이다가 '슬로 라이프 운동'을 펼치는 일본인 '쓰지 신이치' 씨의 인터뷰를 보게 됐어요. 문화인류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쓰지 씨는 경쟁 논리로 피폐해진 인간의 삶을 되돌려놓기 위해 '슬로 라이프 운동'을 주창했지요. 그가 한 말 중에 정말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말이 있었어요.

'경제(經濟)라는 용어는 원래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이는 세상을 잘 관리하는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며 결국 '경제란 기본적으로 환경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리가 받게 되는 모든 은혜를 의미한다'고 하더군요. '경제를 추구할 때는 환경과 타인의 속도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는 '슬로는 곧 자연의 속도'라고 하더군요.

세상이 이처럼 빠르게 변하는 게 결국 조금 더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인간들의 욕망에서 비롯된 건데, 쓰지 씨의 말대로라면 우린 경제의 본래 뜻을 거스르고 속도를 위반하며 살아왔다는 말이지요. 그 속도위반이 환경을 무너뜨리고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성을 상실하게 하고 빈부 격차를 넓혀놓은 주범이 된 거지요.

하지만, 세상은 이미 이런 속도위반을 알고 있지요. 그런데도 자본을 주무르는 사람들은 거꾸로 더 속도를 내라고 강요하지요. 분명 그것이 엄청난 불행을 가져오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말입니다. 쓰지 씨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걸음 한 걸음 가속페달로부터 발을 떼고 내려왔을 때 그 발자국 속에서 피어나는 대안의 새싹을 본다'고 해요. 하지만 앞만 보고 달려가는 지금 여기, 우리의 상황들이 '시스템에, 장벽에 부딪히기 전에 우리 스스로 힘을 길러야 한다'는 그의 권유를 받아들일까요? 과연 이 바쁜 시대에 먹힐까 우려가 되네요.

얼마 전 경주 산내에서 청자의 비색을 재현하기 위해 평생 불과 싸우고 있는 해겸 김해익 선생님을 찾아가 뵈었지요. 그분의 집안은 대대로 옹기를 구워온 집안인데요. 해겸 선생은 옹기를 넘어 토기와 청자로 이어지는 도자기의 비법을 찾는 데 심취해 있었지요. 혼자 전국을 다니며 흙을 찾고 가마를 연구하고 유약을 공부했지만 결국 청자의 비색은 불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해요. 불의 온도, 불의 색깔, 불 때는 방법 등등 지난 수십 년간 제대로 된 청자를 만들려고 불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태워온 거지요.

실로 오랜만에 찾아간 그날도 선생님은 가마 앞에서 불을 때고 계셨는데요. 선생님은 얼마 전에 구운 청자라며 보여주셨는데 비색은 아니었지만 그건 마치 신안 앞바다에서 꺼내놓은 듯 고귀해보였어요. 청자라는 것이 오로지 비색만이 아니라 쑥색 계열의 푸른색도 포함되는 것이어서 선생님의 작품은 박물관에서 봤던 그런 고려청자와 흡사해 보이더군요. 불은 선생님의 오랜 시간처럼 그윽하지만 깊은 열정처럼 붉은 기운을 장작 속에 머금고 있었어요. 10일을 넘게 가마 안에 있는 작품들을 달궈내는 장작불과 선생님은 겉으로는 느리게 보였지만 분명히 엄청난 결과를 품은 거지요.

청자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보내온 한 도공의 느린 시간과 정신없는 속도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시간 중 어떤 시간이 가치가 있을까요? 물론 그 나름의 가치는 다 있겠지만요. 한번 곰곰 생각해볼 일이지요. 조금은 천천히 느리게 내 인생의 시침을 맞춰보는 건 어떨까요.

권미강/대전문학관 운영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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