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당시 조사에 참가했던 하진호 영남문화재연구원 경주 연구실장으로부터 발굴 뒷얘기를 들어봤다.
◆동천동 유적의 의미는?
청동기 시대 마을이 타임머신을 타고 나타났다고 할 정도로 취락 유적 보존상태가 좋았다. 주거, 생산구역, 제사구역, 분묘가 모두 한 곳에 집중되고 환호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청동기 취락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팔거천 일대에는 동호동 등 군소 취락이 존재 했는데 동천동이 일대 마을의 중심으로써 주변 마을을 아우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옥이 60채에 고상건물지가 20곳인데 도시유적으로 볼 여지는 없나-
청동기 시대는 기본적으로 농경사회다. 일부 학자들은 고인돌이나 거석문화의 규모와 동원된 인력을 근거로 도시국가로 추정하도 하기도하는 데 지나친 비약이다. 도시국가가 성립하려면 상하수도, 광장, 제단, 대규모 공연장 같은 공중시설이 기본적으로 갖춰져야 한다.
◆동천동 취락 유적에 마을 규모는?
동천동 유적의 외형적 규모는 남북 300m, 동서 150m로 약 4만5000㎡에 해당한다. 단순 면적을 기준으로 할 때 거주 인원수는 250~300명으로 추정된다.
◆고상가옥의 용도는?
학자들 마다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곡물저장소로 해석하고 있다. 공동 수확한 곡식을 저장하는 마을 공동시설 이었다. 당시에는 쥐나 습기, 곰팡이에 의한 피해가 많았다. 이런 피해를 예방하는 데 고상가옥이 최적의 대안이었을 것이다.
한상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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