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윤희의 아담한 이야기] 오해의 힘

여담이지만, 오래전 나의 어머니가 내 직업에 대해서 친구 분과 대화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 딸? 책 만드는 일을 하지."

"그럼 글 쓰는 직업이네?"

"아니 작가는 아니고, 책을 만들지."

"그럼 책을 많이 보겠네?"

"그으럼!"

아! 어머니, 그으럼이라니요. 어머니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은 멀찍이 앉아있던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나는 책과 관련된 일을 한다. 원고가 책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의 조력자다. 그래서 나는 종종 다독에 취미가 있을 것이라거나, 책에 대한 지식이 비교적 풍부할 것이라는 오해를 받는다. 책과 관련된 주제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나에게로 머문다. 무슨 책이든 내가 당연히 읽었거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이루어지는 대화가 나는 몹시 부담스럽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그 오해로 시작된 대화들과 그리하여 결국은 그 책을 펼쳐보게 된 계기들이 지금의 나를 키운 8할의 힘이 아닐까 싶다.

국내에선 하루에 약 300종에 가까운 책이 신간으로 등록된다. 숫자만 보아서는 정말 책으로 풍요로운 사회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선택하는 책은 한정되어 있다. 한국의 직장인이 1년 평균 읽는 책이 9.8권이라든가 하루 평균 독서 시간이 30분이라든가 일본이나 독일의 독서량은 어떻다든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다. 다만, 스스로의 독서량에 대해서 당당한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조금 궁금하다. 또 그 많은 책들이 어느 하늘 아래서 고독하게 살다가 사라져 가는지도 몹시 궁금하다.

언젠가 아는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고전이나 베스트셀러를 제외한 나머지 책은 나만 읽고 있는 책이라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베스트셀러의 신화를 이루는 책들도 있지만, 많은 책들이 그늘 속에 살다가 묻힌다. 책을 살 때 판권에 나타난 연도가 아주 오래되었음에도 내 손에 쥐여진 책이 초판이라는 사실에 고개를 갸우뚱거릴 때가 많다. 그러니 정말 '나만 읽고 있는 책'이란 말이 맞나 싶기도 하다. 역지사지, 책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안타까움과 책임감을 깊이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책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직업 정신이란 건 좀 유난하다. 다독보다는 다견(多見)이랄까. 전방위적인 지식과 배움에 대한 욕구가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내 책상 위나 책꽂이의 풍경도 그에 부응하는 모습이다. 이즈음엔 불교 서적과 미래학, 디자인, 여행 관련 등 읽거나 보아야 할 책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봄 시즌 매거진들의 리서치 자료용이기도 하고 진행 중인 단행본과 관련된 책들이다. 직업적 연륜과 함께 인문학적 소양과 지식이 입체적으로 쌓이는 것도 이 직업의 특별한 수혜가 아닐까. 예나 지금이나 책 만드는 일에는 수공업적 특성과 지식산업의 특성이 함께 있다. 16세기의 인쇄업자나 서적상이 인문주의자였고 철학자였던 이유도, 활판인쇄공이 수공업자였지만 지식인이기도 했던 이유도 책과 가까이에, 책 속에 파묻혀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봄바람과 봄 햇살, 그리고 묵묵히 겨울을 이겨낸 모든 것들이 경이롭게 느껴지는 주말 오후, 책 만드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인하여 생겨난 오해에 감사하며 서점으로 향한다. 누군가에 의해 쓰이고, 만들어진 멋진 책을 만나겠지. 탁월한 기획과 텍스트, 손맛 좋은 종이, 심혈을 기울인 인쇄와 가공을 거친 책을 만나면 저자는 물론이거니와 편집자나 디자이너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아마도 활판인쇄술을 발명한 구텐베르크나 평판인쇄기를 발명한 프리드리히 쾨니히도 얼마쯤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지도!

편집출판디자인회사 홍익포럼 대표 gratia-de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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