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겨울 눈 오는 날/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새살인 듯 덮인 숲 속으로/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밤나무에 기대서 그 짓을 하는 바람에/ 예년보다 빨리 온 올봄 그 밤나무는/ 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었습니다.'
정현종 시인의 시 '좋은 풍경'입니다. 하얗게 눈이 내려 쌓이는 숲 속으로 올라간 남녀 발자국 한 쌍의 주인공들이 밤나무에 기대어 사랑을 나누었는데, 그 숨결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그 순진하기 짝이 없는 밤나무는 그만 봄이 온 줄 알고 여러 날 피울 꽃을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다는 얘기지요. 어쩌면 외설적이거나 상스러울 법도 한 성애(性愛)의 장면이 성(聖)스러운 생명 탄생의 봄 풍경으로 읽히는 연유는 무엇일까요? 눙치고 멋을 부린 표현도 표현이지만, 아마도 시인이 재미있는 상상력으로 재구성해 보이는 풍경의 신선함 때문이겠지요. 이처럼 상상의 날개를 타면 저속하거나 하찮은 장면도 아름다운 풍경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나는 상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세상입니다. 20세기에서는 '미래의 문맹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지를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지만 이제 '앞으로의 문맹자는 이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상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가상을 상상해서 일상화하는 힘이 생존과 번영을 좌우하는 세상이기 때문이지요. 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만 미국의 9'11테러 진상조사위원회에서 그 끔찍했던 피습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상상력의 빈곤을 꼽았었다지요. 민간 항공기를 대량살상무기로 활용한 기발한 테러 전략을 간파하지 못한 것 자체가 상상력의 빈곤이었다는 겁니다. 상상력의 빈곤이 너무나 큰 재앙을 불러온 셈입니다.
상상력은 우선 과학 문명의 토양이고 뿌리입니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에서 육중한 바위 문을 여는 열쇠는 '열려라 참깨!'라는 주문이었지요. 상상의 언어로 만든 열쇠입니다. 이 동화적 상상이 과학적으로 실현된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는 자동문이지요. 그리고 상상력은 궁극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개혁의 동력입니다. 자신을 옥죄는 존재 조건, 즉 낡고 부조리한 도덕과 관습을 부단히 부수고 더욱 인간적인 제도와 문화를 만들어 내는 힘이지요.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을 찾아 현실화시키는, 이 상상력이 바로 인간의 행복추구권입니다.
상상력과 가장 밀착된 것이 문학이며 시입니다. 시는 근원적으로 상상의 언어로 축조된 우주이지요.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 이렇게 시작되는 서정주 시인의 시 '자화상'을 읽으면서 아무도 시인의 아버지가 정말 종이었는지 노비 문서를 뒤져보지 않습니다. '살구꽃이 피었습니다./ 서문리 이장네 마당/ 짚가리에 기대어 피었습니다./ 지난겨울/ 발 시려운 새들이 앉았다 간 자리마다/ 붉은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이상국 시인의 시 '살구꽃'을 읽는 그 누구도 꽃이 핀 자리가 정말 새의 발자국이 묻어 있는 자리인가 확인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시의 세계가 상상으로 빚은 별도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의 장르 중 가장 험하고 고도감이 높아 사람이 쉽게 오를 수 없는 분야의 하나가 바로 시라고 합니다. 이는, 시의 높은 봉우리를 지탱하는 골재가 논리적이고 개념적인 사고가 아니라 매우 사적인 느낌을 수반하는 상상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시는, 오르고 또 올라 그 봉우리에 서기만 하면 우리 삶의 거의 모든 것을 조망할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합니다. 이 말은 시가 상상력을 세련시킬 수 있는 참 좋은 교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상상력의 근육을 키우는 한 방법으로서 시 읽기는 매우 유효한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봄입니다. 대책 없는 꽃샘추위 앞에서, 생활고의 무거운 바위 앞에서, 번뇌의 헝클어진 가시넝쿨 앞에서 고개를 꺾고 주저앉기보다는 '열려라 참깨'를 열심히 외칠 일입니다. 상상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며 낯선 하늘을 기웃거릴 일입니다. 좋은 시를 찾아 읽으며 싱싱한 봄 풍경을 만들어볼 일입니다.
김동국/시인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