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의 울진 바닷가
새벽 4시 무렵, 프렌치 페이퍼 3층 객실에서 얼핏 잠이 깼다. 이곳에서 제일 뛰어난 풍광은 한밤중이 지나 새벽이 오기 직전에 온다. 3층 객실 앞 테라스 끝으로 다가서니, 불 켠 고깃배가 바다 저 멀리 점점이 떠 있고, 대포 같은 파도소리는 사방을 울린다. 달빛을 받은 바다가 환상적인 희뿌연 빛을 반사하고, 떵떵거리는 대포 소리가 심장의 박동을 채근한다. 세찬 바닷바람에 쓸려 온몸이 휘청거릴 때, 순간 정신이 번쩍 든다.
아! 내가 살아 있구나.
▷건축주와의 첫 만남
건축주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건축물은 좋든 싫든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는다. 2010년 겨울 지금의 프렌치 페이퍼 건축주가 사무실로 첫 방문을 하기로 했다. 시간에 맞춰 들어선 30대 초반의 말쑥한 젊은이는 직접 만든 매스 모형을 들고 나타났다. 종이를 접어 붙인 모형인데, 한눈에 보기에도 스케일이 정확하다. 대지 내 공간배치와 동선까지 감안한 제대로 된 결과물이었다. 건축가가 아닌 비전문가가 이 정도로 구체적이고 제대로 자신의 건축의도를 표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만큼 건축주는 이 프로젝트에 대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고 연구하고 즐기고 상처받은 것이다. 이후 설계를 진행하면서도 건축주는 회의 때마다 자신이 꿈꾸어 온 생각을 말과 스케치, 그리고 사진으로 보여 주었다.
▷거친 외부는 걸러주고, 내부 마당은 생동감 있게
대지 조건은 드라마틱하다. 황량한 도로와 푸른 동해바다 사이에 대지가 있다. 뒤로는 굉음을 내며 왕복 6차로의 넓은 7번 국도가 달리고 앞으로는 망망대해를 마주한다. 거친 도로 환경을 걸러 주고 내부 공간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 펜션의 높은 가벽들을 줄지어 늘어 세워 파수병처럼 건물을 호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방문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의 거름망을 거치면서 바다를 향한 내부공간으로 스며들어간다. 첫 번째는 도롯가의 낮은 시멘트블록 담장이다. 담장과 건물 사이의 주차장과 잔디밭을 반쯤 외부로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 준다. 두 번째는 펜션건물들 사이의 좁은 사이 공간이다. 폭 1~2m의 좁고 불규칙한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골목길을 지나면 비로소 바다로 향한 수영장이 있는 내부마당으로 들어선다.
수영장이 자리한 내부마당은 생동감이 넘친다. 푸른 바닷물을 본떠서 파란색과 흰색 타일로 수영장을 마감했다. 중간에 징검다리도 놓고 물 가까이 누울 수 있는 나무데크도 깔았다. 오후 느지막이 데크에 놓인 긴 의자에 몸을 누일 양이면 해 질 녘의 바다는 별천지가 된다. 불규칙한 건물모양에 어울리는 구불구불한 수영장은 건물과 바다와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단순한 재료로 다양한 공간들을
펜션은 쉬러 오는 곳이다.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휴식하며 다시 충전하는 곳이다. 그러기에 단순해야 한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느낄 수 있는 재료와 질감이 단순해야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다. 프렌치 페이퍼는 펜션 3동과 자그마한 레스토랑으로 이루어졌다. 건물의 외장재료를 노출콘크리트와 시멘트블록으로 한정했다. 노출콘크리트는 장식을 없애고 소재의 느낌을 순수하게 표현한다는 점에서 최적의 재료이다. 시멘트블록 또한 비슷한 질감을 가지면서 쌓는 방식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다. 두 재료를 같이 사용함으로써 비슷한 재료의 미묘한 차이를 살려 안정감 있는 표현을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노출콘크리트가 구조체를 담당하고 시멘트블록은 다양한 표정을 만든다.
펜션이 단순함만으로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일단 안정된 환경에서 새로운 호기심을 야기 시키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즐겁다. 건물을 구성하는 방식에서부터 재미를 만들어 갔다. 단순한 사각박스로 몇 가지의 단위객실을 구성하고, 조금씩 엇갈리게 쌓아 올려 다양한 매스를 만들고, 여기서 생기는 틈새 공간을 재미있는 통로로 활용하였다. 객실로 들어가는 동선 또한 다양하고 여유로워야 한다. 잔디밭 중간으로 난 바닥 돌을 지나거나 건물에서 멀찌감치 분리된 계단을 올라가 산책하듯 객실로 다가설 수 있다. 2층과 3층에서는 어긋나게 배치한 객실 덕분에 다양한 조망이 가능하다. 층별로도 객실의 가로세로 비율과 천정 높이가 제각각이어서 색다른 공간적 재미를 맛볼 수 있다.
▷인테리어 작업과 그 이후
사람들은 일상과 다른 낯선 편안함을 쫓아 펜션을 찾는다. 그런 까닭에 건축주는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소재들을 배제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형광등 대신 노란 전등으로, 일반적 욕실 문이 아닌 돌출형 슬라이딩 도어로, 심지어 스위치 커버까지 색다른 특색을 주었다. 가구들 역시 직접 디자인과 제작을 했다. 일반적인 상황에는 맞지 않는 이질적인 소재들을 가져와 각각의 객실 콘셉트에 맞게 조합을 했다.
완공한 지 몇 년이 흐른 지금, 건축주는 직접 펜션을 운영하며 레스토랑과 접수대를 바삐 오가고 있다. 끊임없이 메뉴를 개발하고 홈페이지 댓글 확인도 빼놓지 않는다. 그러던 차에 부산에서 온 한 펜션 손님이 열심히 살아가는 젊은 건축주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애지중지하는 딸을 선뜻 소개해 주었으니. 이제는 장인어른으로 모시고 산다고 한다. 좋은 인연을 만들며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글=최원범 ㈜건축사사무소 미르건축 대표이사/건축사
사진=프렌치 페이퍼 제공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