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건강편지] 엄마하고 떠나는 이별여행

38세 엄마보다 86세 엄마를 떠나보내는 것이 더 팍팍했다면 믿기 어려울 것이다. 죽음이란 나이가 지긋하면 쉬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거대한 상실은 누구나 처음 가보는 길이라서 어렵다. 그럼에도 '쉽다'는 것은 죽음 이후에도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고 일상을 이어나간다는 것이다. '쉽다'는 말이 결코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지효 엄마가 죽어가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인 지효는 봄방학부터 동생과 함께 엄마가 입원한 호스피스병동에서 지냈다. 그러나 그들은 새 학기가 돼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병원에서 등교했다. 젊은 엄마의 죽음이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세상에 없는 일도 아니다.

지효 엄마는 4년 전 얼굴에 암이 생겼다. 살아나기 위해서 수술을 했고 항암치료도 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세상을 떠날 것 같아 이별 준비도 착착 했다. 종교를 가졌고, 아이들과 여행을 했다. 그나마 예쁜 모습이 남아있을 때 남편에게 턱시도를 입히고 딸아이들에게 흰 드레스를 입혀서 리마인드 웨딩촬영도 했다. 지효가 초경(初經)이 나올 때 옆에 없을 것 같아서 겁내지 말라는 짧은 편지와 생리대, 깔고 자면 표시 안 날 것 같은 짙은색 담요를 넣은 선물 꾸러미를 만들었다.

지효는 공부도 열심히 했다. 의사가 되겠다고 했다. 나는 지효에게 엄마가 어떤 곳에 암이 생겼고 암은 어떤 병인지에 대해 소상히 알려주었다. 얼마 전 지효 집에서 죽은 금붕어 이야기도 했다. 죽어서 어항을 둥둥 떠다니는 금붕어를 지효 동생이 건져서 휴지에 곱게 싸 주었단다. 지효 아빠가 언제까지 아이들을 엄마 옆에 두어야 하는지 차분히 물어왔다. 나는 아이들을 믿었다. 지효와 동생은 엄마가 떠나는 그 순간까지 함께하기로 했다.

석례 할머니도 죽어가고 있었다. 유방암이 소뇌로 전이돼 하지에 힘이 없었다. 기침과 가래가 심하고 열까지 나서 폐렴으로 호스피스병동에 입원을 했다. 석례 할머니는 "이제 그만 빨리 갔으면 좋겠다"고만 되뇌었다. 55세 된 석례 할머니의 딸은 호스피스 체조시간에도 참석하는 등 아주 야무져 보였지만 엄마의 상태에 따라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호스피스병동으로 와서 다른 사람의 죽음을 봐서 엄마가 저렇게 체념하시는 거 아니냐고도 했다가, 석례 할머니가 일시적으로 좋아지시면 감사하다며 호스피스 후원금을 주기도 했다. 이별이란 남는 사람이 준비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떠날 사람이 완벽하게 준비해 주어야지만 남는 사람이 내 인생의 이별 여행을 함께할 수가 있다.

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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