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에 간다. 영화 '실미도'에 나오는 배역들이 분노하고 절망하고 발악하다 끝내 산화하고 마는 그 현장이 보고 싶었다. 실미도 난동사건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국가 권력이 저지른 크나 큰 사건이었다.
실미도는 인천 앞바다 무의도 옆에 붙어 있는 길쭉한 수세미가 누워 있는 형상의 무인도다. 면적은 24만7천여㎡, 섬 둘레 16㎞, 최대 표고 80m인 보잘 것 없는 야산이다. 이 섬은 북파 공작원 31명이 지옥훈련을 받아 인간병기가 되었던 섬이다. 훈련병들은 자발적으로 지원한 게 아니라 기관원들의 유혹과 강제적 포섭에 의해 끌려간 민간인들이었다.
1968년 1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북한의 124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했다. 그해 4월 우리도 대응 보복하기 위해 청와대를 기습한 31명의 숫자와 똑같은 훈련병을 뽑아 김일성 암살을 목표로 당시의 연도(68)와 달(4)의 숫자를 따서 684부대를 창설했다.
부대원들은 철저한 인민군식 실전훈련으로 단 3개월 만에 북파가 가능한 인간무기가 되었다. 그들은 3년 4개월 동안 출동 명령만을 기다렸으나 남북간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됨에 따라 작전 자체가 불확실하게 되어버렸다.
그러던 차에 중앙정보부장(김형욱)이 바뀌면서 부대의 존립 기반이 흔들렸다. 그때부터 684부대는 '구시대 유물' 내지 '유령부대'로 전락하게 된다. 영화에서는 이때의 상황을 실제에 버금 갈 정도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훈련병 전원 제거'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훈련병과 기간병들 간의 교전 장면을 카메라가 예리하게 짚어 나간다.
기간병들은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훈련병들을 각자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상부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또 기미를 알아차린 훈련병 중에는 형제처럼 지낸 통신막사의 기간병 병장을 죽이기 싫다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운명은 서로 죽고 죽이는 한 판 게임을 치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주먹싸움은 몇 대 때리고 맞다가 이기고 지면 그만이다. 그러나 전투는 상대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한다. 그래서 비정하다. 영화에서는 바다로 도망가는 기간병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며 욕설과 함께 "미안하다"고 읊조리는 장면이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 어느 훈련병은 기간병을 죽이지 않고 살려 주었다. 어느 기간병은 화장실 밑에 숨어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이날 교전으로 기간병 24명 중 18명이 사살되고 6명이 목숨을 건졌다. 훈련병과 기간병의 교전은 애초부터 게임이 되지 않았다. 훈련이 실전이었던 훈련병들은 단 10분 만에 기간병 대부분을 사살했다.
1971년 8월 23일 오전에 일어난 일이다. 훈련병들은 이날 낮 12시 20분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하여 버스를 뺏어 서울로 가던 중 이를 제지하던 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버스 타이어가 터져 갈 수 없게 되자 수원~인천간 시외버스를 다시 탈취했으나 군의 방어벽에 막히자 영등포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마지막 총격전을 벌이다 수류탄을 터트려 자폭했다.
북파 훈련병 31명 중 7명은 훈련 중 사망하고 4명이 최종 생존했으나 군재판에 회부되어 72년 3월 1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 실미도 사건을 소설로 쓴 작가 백동호는 '훈련병들이 섬을 빠져 나올 때 3명의 이탈자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작가는 그중 한 명을 만났으며 한 명은 현재 외국에 있다고 했다. 이 소설을 영화로 찍은 강우석 감독 작품 '실미도'는 1천100만 관객이 몰려옴으로써 묻혀있던 실미도의 진상이 세상에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
이 섬에 와서 최근세 잔혹사 중의 하나인 '실미도 난동 사건'을 속속들이 알게 된 것은 나에겐 큰 소득이었다. 국가와 국민 간의 역학관계가 링컨 대통령이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말한 '국민의(of the people), 국민에 의한(by the people), 국민을 위한(for the people) 정부'와는 전혀 다르게 비뚤어질 수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실미도는 하루 두 번씩 모세의 기적처럼 바닷길이 열린다. '목새'라는 곳이 그곳이다. 충북 진천의 롱다리처럼 돌다리가 놓여 있는 곳을 넘어서면 실미도로 바로 들어 갈 수 있다. 실미도엔 훈련병들이 기거했던 흔적은 물론 영화를 찍을 때의 세트조차 없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개인 소유의 무인도여서 1인당 2천원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실미도 입구 안내판에는 훈련병들이 섬으로 들어오게 된 시말과 그들의 임무가 적혀 있었다. "주석궁에 침투, 김일성의 목을 따오는 것이 너희들의 임무다." 임무는 수행되지 못했고 여러 젊음들이 핏빛 꽃으로 산화했을 뿐이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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