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년 전에도 '삼성이 무엇을 한다'고 하면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제일제당'제일모직 등 경공업 분야에서 잇따라 성공을 거둔 호암이 1968년 중앙일보 지면을 통해 "전자산업에 뛰어들겠다"고 발표하자 온 나라가 난리 났다.
삼성이 진출하면 대한민국 전자업계는 다 망한다며 기존 업계가 가장 큰 반발을 했다. 국회의원들까지 나서 삼성이 전자산업을 하면 안 된다는 의견을 냈다.
삼성이 정부에 사업허가 신청서를 냈지만 담당 공무원들은 허가서를 내주지 않았다. 기존 업계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호암이 직접 나서 공무원들에 대한 설득에 나섰지만 사업허가는 계속해서 늦어졌다.
호암은 정면 돌파를 하기로 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것이다.
"각하, 전자산업은 참으로 장래성이 있는 사업입니다. 이것은 (삼성의 사업이 아니라) 국가적 사업이 되어야 합니다." 호암은 박 대통령에게 간곡하게 설명했다.
박 대통령은 호암의 말을 오랜 시간 동안 묵묵히 들었다. 그러고는 한마디만 했다. "즉시 전자산업 전반에 대한 개방 조치를 하겠습니다." 삼성이 전자산업에 뛰어들어도 좋다는 박 대통령의 결정은 속전속결로 떨어졌다.
◆정상에서의 새로운 변신
1950년대에 호암이 세운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은 그야말로 잘나갔다. 호암은 단숨에 대한민국 최고 재벌로 올라섰다.
하지만 호암은 단순한 부자로 사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꿈꾸는 짓'에 불과했던 전자산업에 대한 도전에 나섰다.
1969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연간 수출액은 4천200만달러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저임금을 활용한 미국계 회사들의 전자부품 조립 수출이 70%를 차지할 정도로 전자산업의 기반은 허약했다.
하지만 호암은 대통령과의 담판을 통해 '꿈'을 현실로 이루기 위한 발걸음을 시작했다.
"일본은 1950년대에 전자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출, 불과 10여 년 만에 서구와 겨루게 되었다. 기술만 도입하면 삼성도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나는 (불가능이란 없다고) 확신한다." 호암은 이렇게 자신했다.
마침내 1969년 1월 13일, 수십 년 후 세계 최고의 대열에 오르게 되는 '삼성전자공업'이 설립됐다.
삼성전자 신화를 일궈낸 대표적 인물인 경북대 사대부고 출신의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 등이 바로 이 시기 삼성전자 창립 멤버다.
삼성전자는 발족 9년 만인 1978년 무렵, 이미 신화를 쓰기 시작했다. 1978년 삼성전자는 흑백TV 200만 대를 생산, 일본의 마쓰시타를 앞섰다. 연간 생산으로는 세계 최고 기록이었다.
◆미래를 보고 변신하라
1979년 9월, 삼성전자는 체신부로부터 정부 기관 민영화 입찰에 참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산업은행이 전액 출자해 만든 구미 한국정보통신(KTC)을 민영화해야 하는데 살 기업이 없으니 삼성이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체신부는 한국정보통신이 골칫거리였다. 심각한 전화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전자식 교환기 도입을 주 업무로 하는 한국정보통신을 국책기관으로 만들었는데 돈이 부족, 전자식 교환기에 투자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전화보급률이 엄청나게 낮았다. 전화 한 대 개통하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했다. 개통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돈도 150만~200만원에 이르렀다. 허름한 집 한 채 값이었다.
전화 부족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커져가자 정부는 여러 기업에 SOS를 보냈다. 한국정보통신을 맡아 전자식 교환기 등에 대한 투자를 통해 전화 부족 사태를 해결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손사래를 쳤다. 대규모 투자가 들어가는 사업인데 이익 실현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호암은 달랐다. 구미의 한국전자통신을 인수, 통신기기 사업을 본격화했다. 호암은 1982년 5월 구미 공장을 직접 찾기도 했다. 구미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는 것이다.
호암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삼성전자 구미공장은 반자동 전자교환기 개발에 이어 1985년에는 전자동으로 시스템이 가동되는 전전자교환기의 국산화에 성공했다. 우리나라의 전화 적체를 삼성 구미공장이 해소해 낸 것이다.
삼성 구미공장은 행정기관 납품 중심의 교환기 사업에서 탈피, 일찌감치 사업 다각화에 나섰고 일반전화기, 팩스, 삐삐를 잇따라 내놓은 데 이어 휴대전화까지 생산해냈다. 호암의 미래를 보는 식견 덕분에 삼성은 통신기기 사업을 통해 많은 이익을 냈고, 애니콜 신화에 이어 오늘날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의 최고 강자가 됐다.
◆변신에는 장애물이 없다
호암의 사업 영역에는 울타리가 없었다. 삼성전자에 이어 본격적으로 중화학공업에 진출, 1974년 울산에 삼성석유화학을 만들었다.
사실 오늘날 울산공업단지는 호암이 출발시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호암은 울산의 위치적 장점을 잘 파악하고 한국경제인협회 초대 회장을 맡았을 무렵, 정부에 건의해 공업단지를 조성하도록 했다. 이후 울산은 국가 주도 경제개발계획지역에 포함돼 석유화학산업은 물론, 오늘날 자동차산업의 메카로 떠올랐다.
호암은 석유화학에서 멈추지 않았다. 1977년 호암은 조선소를 인수, 조선업을 시작했다. 오늘날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다.
호암은 이내 방위산업에까지 손을 뻗쳤다. 항공기를 만들겠다는 시도까지 한 것이다. 1978년 탄생한 삼성정밀이 항공기 사업 시도로 탄생한 기업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호암은 원자력산업에까지 도전하려 했다. 호암은 핵연료 재처리공장 건설에 대한 구상을 했다. 핵은 군사적 목적에도 이용될 수 있지만 평화적 산업으로서도 이용가치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이 호암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호암의 원자력산업 도전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당시 정치적'외교적 상황이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호암은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삼성이라는 간판을 내건 기업을 속사포처럼 잇따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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