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람들은 모두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첫날 내가 봤던 성냥갑들이 하나에 10억, 20억원 하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의 저자 영국인 다니엘 튜더 씨는 한 신문 칼럼에서 한국의 아파트 문화를 이렇게 꼬집었다. 아파트는 변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층수는 더 높아지고, 이름은 더 어려워진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도시인이 사는 공간은 여전히 아파트라는 사실이다. 편리한 아파트 대신 마당이 주는 편안함과 시끄러울 자유를 찾아 주택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파트 숲 속에 숨겨진 주택 거주자들을 찾아 짧은 여행을 떠나봤다.
◆ 집 곳곳에 스민 사연, 주택의 매력
"우리 집은 전원주택이 아니에요. 그냥 도심 속 집이죠."
도옥주(51'여) 씨를 따라 차를 몰고 찾은 경산시 평산동 주택단지. 그 설명이 정확했다. 낮은 담장과 마당에 곱게 깔린 잔디, 깔끔한 외형의 3층 주택 뒤에는 산 대신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늘어서 있다. 평산동 일대에는 최근 2, 3년 새 주택이 하나둘씩 새로 들어서 이제 10곳 넘는 집들이 작은 동네를 이루고 있다.
나지막한 벚나무의 키가 말해주듯 도 씨 가족이 이곳으로 이사 온 것은 2년 전 겨울이었다. 20년 넘는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대구에서 경산으로 이사 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시어머님이 편찮으셨어요. 요즘 새로 지은 아파트는 들어가는 출입구도 어렵고 복잡하잖아요. 어머님이 외출을 잘 안 하셔서 건강이 더 염려됐어요. 중학교 2학년인 막내딸 교육도 고려했지만 가족회의 끝에 마당이 있는 주택으로 이사 가기로 했어요. 조건은 도심과 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죠."
추진력 넘치는 남편 덕분에 '집짓기 프로젝트'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2012년 7월에 땅을 사 가을에 집을 짓고, 그해 겨울 이사를 했다. 치열한 가족회의 끝에 완성된 집이기에 집 곳곳에서 식구들의 개성과 취향이 묻어난다. 세 딸의 방은 창문 위치와 크기, 벽지 색깔이 제각각이다. 큰 딸(24)과 둘째 딸(21) 방에 재밌는 사연이 있다며 도 씨가 설명했다. "남향을 좋아했던 둘째가 집 설계 전 첫째와 협상을 했어요. '언니 방 크기를 늘리고 내 방을 더 작게 해라. 단, 나는 남향 방을 갖겠다'고요. 이렇게 해서 둘째는 남향 창이 달린 작은 방, 첫째는 북향이지만 큰 방을 갖게 됐어요. 하하."
◆ 시끄러울 자유를 택하다
아파트에서는 이웃 눈치가 보여 밤중에 못질 한 번 하기 어렵다. 도 씨도 마찬가지였다. 낮에 청소기를 돌리는데 아랫집에서 "우리는 낮에 자야 한다"며 청소기 사용을 문제 삼기도 했고, 애완견 똘이(10)가 짖는 소리 때문에 항의를 받은 것도 수차례였다. 도 씨 가족은 현재 시끄러울 권리를 맘껏 누리고 있다. 밤 12시에 세탁기를 돌리고, 피아노를 쳐도 아무도 항의하지 않는다. 도 씨는 "이웃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짖고 뛸 수 있는 똘이가 최대 수혜자"라며 마당을 뛰어다니는 애완견을 바라봤다.
주택에 사는 이들은 종종 "불편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불편은 개인차다. 아파트 거주자는 편리함의 대가로 '관리비'를 지불한다. 대신 주택에서 관리는 오롯이 사는 사람의 몫이다. 마당의 잔디와 꽃나무도 업체의 도움을 받지 않고 가족들이 직접 심었다. "주택으로 이사 온 뒤 쓰레기를 언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주민센터에 전화해서 물어봤어요. 불편도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내 집이니까 내가 가꾸고, 돌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져요."
주택으로 온 뒤 얻은 것도 많다. 바로 '이웃'이다. 10가구 남짓한 소규모 공동체지만 지난달 처음으로 반상회를 열었다. 도 씨는 "얼마 전 옆집이 휴가를 가면서 차고 문을 열어놓았기에 우리가 닫아줬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서 참 좋다"고 만족해했다.
그래도 편리한 아파트 생활이 조금은 그립지 않을까. 도 씨는 "만약 다시 아파트로 가겠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노"라고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는 "세 딸이 가끔 집 바로 앞에 지하철역이 있었던 아파트 생활을 그리워하긴 하지만 주택이 주는 '자유'를 이제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활짝 웃었다.
◆ 길고양이도 내 이웃, 기르는 매력
대구 동구 효목동에 사는 권가은(여'23'대학생) 씨 집에는 재밌는 공간이 많다. "지하실이 있다"는 말을 듣고 여기저기 살펴봤더니 현관 계단 아래 신발장처럼 생긴 미닫이 유리문이 눈에 띄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하실로 연결되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지하실에서 권 씨 아버지는 각종 목공 작업을, 어머니는 과실주를 담근다. 권 씨는 "아파트에는 없는 신기한 공간이 많다. 2층에는 다락방이 있고, 지금은 쓰지 않지만 집 뒤에는 '뒷간'도 있다"고 귀띔했다.
권 씨는 20년 넘게 지금껏 한집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집에 얽힌 추억도 많다. 할머니가 텃밭에 심어둔 상추와 각종 야채들을 오리가 다 먹는 바람에 할머니의 미움을 산 이야기부터 '빨간 고무 다라이'에 물을 가득 담아 물장구를 치고 놀았던 추억까지 하나씩 열거하면 끝도 없다. "옥상에서 '잡기 놀이'도 했고, 음… 또 보자. 제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남는 방에 전세를 줬는데 그 집 아기와도 참 많이 놀았어요. 다 좋은 경험이었어요."
주택의 가장 큰 매력은 생명을 '기르는 데' 있다. 소'돼지를 제외하고 오리와 닭, 개, 고양이 등 대표 가축들은 대부분 이 집을 거쳐 갔다. 권 씨 마당 한편에는 단풍과 모과나무가 자리 잡고 있고, 바닥에는 고구마 잎사귀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권 씨가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답지 않게 식물과 곤충 이름을 잘 맞추는 것도 이 같은 환경 덕이다. 그는 "예전에 병아리 18마리를 키웠는데 2마리 빼고 닭으로 장성(?)했다"며 자랑했다.
권 씨 집 마당에는 '길고양이 급식소'도 있다. 마당에 있는 작은 접시도 고양이 전용 밥그릇이다. "아빠가 퇴근하시는 오후 7~8시가 되면 고양이 세 마리가 귀신같이 알고 찾아와요. 마당에서 놀면서 쉬다가는 녀석들도 있고, 고양이들을 보면 저도 기분이 좋아져요."
아파트 생활 대신 주택에서 첫 살림을 차린 신혼부부도 있다. 지난해 결혼한 원종환(31'대구 서구 평리동) 씨가 사는 곳은 2층짜리 주택 1층이다. 2층에는 원 씨 누나 가족이 살고 있어 '한 지붕 두 가족'인 셈이다.
그가 주택 예찬론자는 아니다. 원 씨는 "마당이 있어서 좋긴 하지만 주택은 아파트보다 춥고 화단에 있는 벌레가 집 안으로 들어온다. 또 집에 사람이 비면 택배 맡아줄 사람도 없고 소소한 불편함이 있다"며 "하지만 택배는 회사로 받으면 되니까 이런 일을 큰 불편이라고 말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원 씨 부부는 둘 다 건축가다. 건축가 부부가 생각하는 주택의 장점은 뭘까. "주택에는 집주인의 개성이 있어요. 아파트는 정형화된 틀을 바꾸기 힘든데 주택은 자신이 어떻게 가꾸고 꾸미느냐에 따라 달라지잖아요. 그리고 아파트는 꽃도 화단도 내 것이 아니고 '공동 소유'에요. 하지만 주택은 다르죠. 주택에서 집의 매력을 느꼈으니 앞으로 이사하더라도 주택으로 가고 싶어요."
글 사진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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