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기업이나 기업가가 역사적 평가를 받은 예가 없지만 그 역사적인 인물 중에서도 훌륭한 기업가라고 할 만한 분들이 많다. 특히 신라시대의 장보고 같은 위대한 존재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천년 전 해상무역로를 개척하여 중국이나 일본은 말할 것도 없이, 멀리 동지나해 깊숙이까지 그 세력을 뻗치면서 상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동아시아 일대를 누비는 절대적인 힘의 무역상이었다. 중국 사서나 일본 고서에도 장보고는 그 위대한 이름을 남기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다. 흔한 정치가나 장군의 동상은 있지만 그의 동상 하나 없다."(호암자전 중에서)
호암은 신라시대 이미 세계를 꿰뚫어보는 눈을 가졌던 '글로벌 플레이어'(Global Player) 장보고를 높이 평가했다. 호암 역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소유했던 혜안(慧眼)의 경영자였기 때문이다.
◆영원한 세계 최강은 없다
1982년 봄 미국 샌프란시스코. 보스턴대학 명예경영학 박사 학위 수여식 참석차 20여 년 만에 미국을 다시 찾은 호암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자급자족이 가능한 유일한 나라였던 미국이 비틀거리고 있는 현장을 목격했다.
"일본의 철강이나 자동차가 미국 시장을 휩쓸고 있었다. 전통산업뿐만 아니었다. 미국이 설계한 생산설비를 도입, 대량생산 체제를 갖춘 일본은 반도체마저 미국시장을 침식하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 반도체 제품의 대량공세에 밀려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생산공정의 합리화,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미국은 위기에 제때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호암자전 중에서)
호암은 세계 최강 미국도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깨쳤다.
미국 시장을 뒤흔드는 일본의 힘을 본 호암은 불과 2년 전인 1980년 봄, 일본 방문 때 한 경제전문가가 던진 말을 떠올렸다.
"제철'조선'석유화학'시멘트'섬유 등 일본의 기간산업은 과잉경쟁 및 과다생산으로 도산이 속출했다. 부존자원이 없는 일본으로서는 큰 문제였다. 하지만 일본은 1973년 오일쇼크 이후 기간산업을 최대 50%까지 줄이는 구조조정을 하고 반도체'컴퓨터'신소재'광통신'유전공학'우주'해양공학 등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기술 분야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정부도 전략산업으로 정해 정책적 뒷받침을 했고, 그 결과 수출이 획기적으로 늘었다." 이 전문가는 일본이 미국 시장을 점령한 이유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었다.
그는 세계 최강 미국도 흔들리는 판에 전통산업에 치우쳐 있는 삼성은 새로운 판을 짜야겠다고 이때 결심했다.
◆세계 시장에서 승부할 무기
반도체처럼 가볍고, 얇고, 짧고, 작은 '첨단기술형' 제품. 1980년대 초반 세계 무역의 최강자로 떠오르기 시작한 일본이 내세운 무기였다.
"언제나 삼성은 새 사업을 선택할 때는 항상 그 기준이 명확했다. 국가적 필요성이 무엇이냐, 국민의 이해가 어떻게 되느냐, 또한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을까 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 기준에 견주어 현단계의 국가적 과제는 산업의 쌀이며 21세기를 개척할 산업혁신의 핵인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1982년 미국 방문 직후 호암은 반도체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호암은 언제나 속전속결이었다. 1983년 3월 15일 호암은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다'는 내용을 공식 발표했다. 만 나이로 73세.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엔 많은 나이였다. 하지만 호암을 결단을 내렸다.
경기도 기흥에 터를 잡고 반도체 제조시설 건설 공사를 진행했다. 1983년 9월 12일에 착공한 이 공장은 불과 6개월 18일 만인 1984년 3월 31일 완공됐다. 세계 최단기 반도체 라인 건설이자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3번째로 대한민국이 반도체 생산공장을 갖는 순간이었다.
호암은 인력 확보를 위해 미국에 있던 유학파 기술진들을 스카우트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훗날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내게 되는 진대제 박사도 이때 삼성에 합류했다.
호암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삼성반도체 기술진은 1983년 11월, 세계에서 3번째로 64KD램을 개발해냈다. 일본이 20년 걸려 해낸 일을 불과 1년 안팎의 기간 안에 해낸 것이다. 삼성은 1984년 10월엔 256KD램을 독자적으로 개발해냈다.
이후 삼성의 반도체는 IBM PC에 탑재되는 등 세계시장에서 승승장구했고, 오늘날 세계 최고 반도체 생산기업이 됐다. 호암은 "하면 된다"는 것을 우리 산업현장에 일깨워준 기업인이었다.
◆울타리 밖에서 배울 것을 찾아라
호암은 1930년대 사업 초창기부터 해외에서 답을 찾아냈다. 삼성상회 창업 전 중국 대륙 여행을 했고, 언제나 정초가 되면 일본을 방문해 새로운 사업에 대한 고민을 했다. 이른바 '도쿄 구상'이다.
"(제일모직의 성공 이후 또 다른 사업을 구상하던 차에) 해외에 나가면 어떤 활로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여행길에 올랐다. 1959년 늦은 가을이었다. 미국을 거쳐 도쿄에 들렀다. 새해를 이곳에서 맞기로 했다. 이후 습관이 되다시피 했다. 새해를 도쿄의 호텔에서 맞곤 한다. 도쿄에서 여러 분야 전문가들과 만나 그들의 축적된 정보와 의견을 듣는다."
호암은 사실 일본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비교적 단기간에 산업혁명에 성공한 나라이고, 부존자원이 없다는 점에서 일본은 우리나라와 유사했다. 이 때문에 호암은 도쿄를 방문해 많은 것을 연구했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일본에서 배울 것이 많다던 호암은 일본을 반드시 이기고 세계 최강이 되려는 세계 기업인이기도 했다.
"전자'제당'모직 등 일본에 비해 비교우위 산업이 우리 삼성그룹 내에도 허다하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일본에 대한 패배감이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특히 전자 판매 종사자들의 만연된 패배의식은 한심하다. 이를 불식해야 한다. 단기 목표, 근시안적 경영, 경쟁사를 국내의 모 업체라고 보는 견해는 지극히 한심하다. 세계 시장을 놓고 우리의 위치를 찾아야 한다. 분명히 일본을 이길 자신이 있다."(1982년 3월 1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스탠퍼드코트 호텔에서)
호암은 일본을 따라잡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세계 일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암의 노력은 삼성을 '세계 최고' 기업으로 올려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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