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중국의 유명 화가들은 모두 미쳤다.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그림 한 점을 그려서 수억원씩을 벌고 나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예술은 죽었고 상술만 남았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자본주의, 혹은 중국식 사회주의가 혼재되면서 충돌하고 있는 지금 중국에서 정신이 황폐화되고 있다."
장젠화(張建華'41)는 현대 중국의 대표적인 민중예술가다.
중국 농촌의 현실을 고발한 '좡탕춘'(庄塘村'1998~2003) 시리즈에서부터 광부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그린 '헤이진'(黑金'중국에서는 석탄을 '검은 황금'이라는 뜻의 헤이진으로 부르고 있다. 2005~2007)에 이어 거리의 여자들을 생생하게 표현한 '예라이샹'(夜來香'2007~2010)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밑바닥 서민, 라오바이싱(老百姓)의 모습을 장젠화만큼 생생하게 표현한 예술가는 없었다.
장젠화는 베이징의 예술촌인 798거리에서 직접 광부로 분장해서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고, 소호거리에서 좡탕춘 연작 시리즈를 전시하기도 했고, 벌거벗고 거리의 여자와 뒤엉키는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베이징 시 당국이 도시개발을 이유로 새롭게 조성된 예술촌 철거에 나서자 직접 지붕 위에 올라가 철거에 반대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이 같은 장젠화의 일련의 작품은 중국의 어두운 현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유럽 등 서방 평단의 주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 공안당국의 관심도 동시에 끌었다. 수시로 공안이 그를 찾아왔다. 그가 표현하는 작품들은 사실 중국 정부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개혁개방의 이면(裏面)이자 상처를 고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지금껏 굴하지 않고 현실을 드러내는 작업을 계속해오고 있다.
웨민쥔(岳敏君)과 장샤오강(張曉剛), 팡리쥔(方力鈞), 쩡판즈(曾梵志) 등 이른바 중국 현대미술의 '4대 천왕'으로 꼽히는 작가들이 중국식 사회주의가 담고 있는 모순을 날카롭게 풍자하는 작품을 통해 성가를 올리고 평단의 찬사를 받기 시작할 때, 장젠화는 현재의 중국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쩡판즈의 '최후의 만찬' 같은 100호짜리(가로 1.62m) 작품 한 점이 250억원을 오르내릴 정도로 예술가들이 돈방석에 앉아 자본주의의 달콤함에 빠져 있을 때 장젠화도 작품을 팔아 적잖은 돈을 벌었다.
그도 유럽에 가서 여러 차례 전시회를 했고, 베이징에 아파트를 장만했고, 외제 승용차도 구입했다. 작품 재료 사기에도 허덕이며 배고프던 시절은 이미 지났다.
그러나 그는 최근 들어 농민과 농민공(農民工) 등 라오바이싱의 모습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있다.
몇 년 전 중국 최고의 미술대학인 중앙미술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데 이어, 지난해부터 중국 사회과학원 박사과정에서 중국 역사, 황제들의 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민중예술가'로서 이름을 얻었던 그였지만 이제는 라오바이싱에서 황제로 관심을 옮겨간 것이다.
"라오바이싱에 대한 관심을 접은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관심이 역사로 확장되면서 자연스럽게 황제까지 올라간 것이다. 황제들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중국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히 황제들의 문화, 귀족문화는 중국의 오랜 전통문화의 정수이자 중국문화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다. 라오바이싱 역시 평생의 주제다."
장젠화의 변화는 중국 현대미술의 변화와 연결되고 있다. 최근까지 세계미술계의 블루칩으로 떠오른 4대 천왕을 비롯한 중국 작가들의 작품은 급속한 자본주의화로 온갖 모순과 부조화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 주는 중국 사회의 모습들을 잘 표현하면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중국 경제가 급격하게 성장하고 중국이 미국과 함께 G2로 우뚝 서면서 중국의 벼락부자들이 중국 미술시장의 큰손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들 중국의 큰손들이 성장의 이면을 드러내고 표현한 작품들을 불편해하면서 소장 가치가 높은 전통적인 골동품 등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황제들의 역사와 황가문화에 대한 장젠화의 관심은 이 같은 중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조류를 반영한 것이다.
그는 몇 년 전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정부가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중국 사회의 어두운 상처, 인간의 약점을 계속 추구할 것이다. 정부는 계속 감추려고 할 것이지만 나는 드러낼 것이다. 그것이 우리나라(중국)에 대한 나의 책임감이라고 생각한다. 형이상학적인 예술이 주는 즐거움도 있지만 내가 추구하는 것은 지독한 현실주의다. 사람들을 깨어나게 하는 현실, 그 현실을 직시하고 일깨워 주는 그런 역할이 내가 할 수 있는 몫이다."
그래서 그는 '대촌장'이라는 작품을 통해 농민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을 고발하면서 마오쩌둥 같은 정치권력을 풍자했다. 또 그가 형상화한 광부 시리즈와 '예라이샹'은 자본주의화된 중국 사회의 아픈 상처들이었다.
그가 "예술은 사라지고 상술만 남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그가 지금껏 해오던 중국 사회를 드러내던 사실주의가 중국 사회의 여러 가지 '현실적인' 벽에 부딪히자 출구를 찾아나선 것 아니냐는 느낌도 들었다.
"중국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지금까지와 같은 작품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다. 라오바이싱은 서방에서 좋아하는 주제이기는 하지만 중국에서는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중국에서는 내 작품을 사서 소장하는 것조차 불편하게 여긴다."
그가 새롭게 공부하고 있는 중국 역사와 황제 문화가 박제된 듯 반짝이는 황금처럼 라오바이싱의 문화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젠화답게 현실을 담는 새로운 도구로 그의 작품세계에서 또 다른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해본다.
베이징과 후베이성 사이에 위치한 새로운 예술촌 '쑹좡'(宋庄)에 자리 잡은 그의 작업실에는 쓰레기 더미 따위로 쌓아 올린 CCTV처럼 생긴 건물 위에 매달린 예수와 부처, 그리고 무수한 군상들로 만들어진 설치작품이 있다. '폐허'라는 이름이 붙은 이 작품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세상의 종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등 모든 사상이 뒤섞여 있는 중국의 한 단면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그가 해 온 이야기를 설치작품에 담고 있는 셈이다. 거기에는 마르크스와 레닌이 있고 마오쩌둥 주석과 칸트, 미셀 푸코 등 동시대의 석학들도 있었다. 중국 정부에 저항하는 '아이콘'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이웨이웨이(艾未未)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그는 사실상 작품활동을 접었다.
그리고는 중국의 황제들과 역사 공부에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다른 (중국의) 예술가들이 예술을 버리고 자본주의의 유혹에 깊숙하게 빠져들어 갔지만 역사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더 잘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저장(浙江)미술학원'을 졸업하면서 "내가 보고 느끼는 세상은 척박하고 어렵다. '아무리 아름다운 세계를 캔버스에 구현해 놓았다 한들 그것이 과연 진정한 아름다움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라오바이싱의 삶에 천착하기 시작한 그의 새로운 도전이 황제 이야기인 셈이다.
물론 거기에는 더 이상 라오바이싱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는 중국 시장에서 돈을 벌거나 생존할 수 없다는 절박한 문제도 내포돼 있지만, 그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깊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바닥층, 라오바이싱의 문화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더 좋거나 나쁘다는 차원이 아니라 소장하기에는 불편하다.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작품은 소장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그런 문화를 담는 것이다. 소장가치가 있는 작품을 하기 위해서는 더 깊이 역사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주의 덫에 빠져버린 중국의 예술가들. 서구보다 더 돈의 노예가 된 중국 사회의 단면들을 통렬하게 고발하면서 유명해지고 돈을 벌게 된 중국 예술가들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
장젠화는 "예술가도 돈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다. 돈이 있어야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진정한 예술가는 돈에 구애받지 않단다"고 말한다.
"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이 작품이 팔리기 시작하면서 무섭게 돈을 벌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작품을 하지 못하게 됐다고 고백하더라. 어느 날부터 갑자기 공허해지고 그림을 그려도 뭔가 부족한 것 같다고 했다. 예술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렸다고 할까. 그는 이제 '진정한' 예술가가 아니다. 그게 예술가의 비애다. 너무 많아도 안 되고 없어서도 안 되는, 돈이란 예술가에게 그런 존재다."
그의 말은 스스로의 고해성사 같았다. 자본주의의 노예가 돼버린 중국 사회를 고발한 일련의 작품이 오히려 돈을 버는 수단이 되면서 예술가의 발목을 잡아버린 것이다. 전 세계가 중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과 치부를 표현한 당대 작가들의 작품에 열광하고 있지만 정작 중국의 당대 작가들은 이제 중국 사회와 체제에 대한 풍자와 사실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탈출구를 찾고 있다.
서명수 서울정경부장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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