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 속의 인물] 독립운동 동지들과 함께 잠 들지 못한 김봉각

'조선 청년의 갈 길은 오직 하나, 조국 독립과 민족 해방을 위하여 헌신하는 길뿐이다.' 제주에서 태어나 일본 오사카에서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던 제주 출신 유학생 5명(강금종'고봉조'김병목'부임전'한만숙)과 함께 1940년 오늘 독립운동 비밀결사체인 '계림동지회'(鷄林同志會)를 만든 김봉각(金奉珏'1921~1999)의 각오였다. '계림'은 신라의 다른 이름이니 말하자면 조국을 뜻했다. 앞서 1940년 4월에 조직한 '흥아연구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새로 꾸린 항일 독립 비밀 단체였다.

이들은 조직과 자금, 교육, 연락 등 각자 역할을 나누고 항일 독립 활동지침을 마련했다. 조직의 비밀 누설 금지, 출석과 시간 엄수, 한국말로 회의 진행, 근신과 주색 삼가기, 동지영입 시 6명 전원합의 결정, 회의결과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을 것 등 구체적 행동강령까지 정하고 활동하다 1941년 2월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김봉각은 이듬해 9월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다.

1945년 일제 패망 뒤 조총련 활동을 하다 김일성 유일사상과 주체사상을 비판하고 1986년 조청련을 탈퇴했다. 1990년 고향을 찾아 당시 1억 엔을 내놓고 3'1만세운동 성역화사업 지원에 나서 3'1독립운동기념탑 건립에 힘을 보태며 고향과 조국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1990년, 1999년, 2003년 3차례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에도 좌익활동을 이유로 제외됐다고 한다. 동지들이 묻힌 국립현충원에 함께 잠들지 못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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