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짧은 글은, 도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쓴 것일까요?
'힘센 시간의 거친 숨결에/ 심술궂던 꽃샘추위도 약속 없이 돌아가고/ 싱그러운 신록을 풍성하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나버린 흔적을/ 새벽 꿈 같이 떠올리며/ 아름다운 봄날 내내 땀 흘려 다듬어진/ 샛별의 달라진 모습과/ 제마다 다른 꿈을 꾸며/ 오늘까지 가꾸어 온/ 우리 아이들의 예쁜 모습을/ 오월 첫 자락에 운동장에 새기고자 합니다./ 부디 오셔서/ 가족과 함께 두 손바닥 열정으로 마주쳐 소리 내며/ 신바람 나는 하루를 지내시길 바랍니다.'
시의 구조를 흉내 내어 행과 연으로 얽어놓았지만, 의미의 그물망이 제대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 바람이 숭숭 새는 글입니다. 이 아리송한 글을 어느 학교에서 학부모에게 보낸 '운동회 안내문'으로 읽어 냈다면 당신은 참으로 훌륭한 독자이십니다. 이 안내문에서 보듯이 사람들은 글쓰기라면 우선 문학적 글쓰기를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글 쓰는 목적이 주장인지, 설득인지, 설명인지, 호소인지, 당부인지, 반박인지, 질타인지, 제안인지, 사과인지를 불문하고 어떤 기조의 글에서든지 문학적 표현 양식을 빌리거나 형용사라는 화장품으로 덕지덕지 떡칠을 해 글쓰기의 원래 의도를 흐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글쓰기에 관해서 이보다도 더 답답한 일은, 많은 사람이 스스로 글을 쓰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예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을 외치며 쓰기맹(盲)을 자처하고 나섭니다. 그래서 자기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해야 할 짧은 인사말조차도 남이 써 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뜻밖에 많습니다. 고백하건대, 문단 말석에 이름 석 자를 얹은 후에 제가 이제까지 청탁받은 글쓰기의 대부분도 마을 조기축구회장인 선배가 잔뜩 무게를 잡고 읽을 '조기축구대회'의 대회사를 비롯해 친구 어머니의 회갑잔치 기념 수건에 새길 짧은 말, 개인전시회나 무용발표회의 팸플릿에 새길 인사말 등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아파트 위층에 사는 아주머니가 찾아와 전교어린이회장 선거에 나서는 초등학교 6학년 아들 녀석의 소견 발표문을 써달라고 정중히 부탁을 하는데 정말 기가 꽉꽉 막혔습니다.
글줄이나 쓴다고 아무 글이나 잘 쓸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연설문 하나 쓰려면 우선 자료 조사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언제, 어느 행사에서,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한다면 그 행사의 목적, 청중들의 성향, 말하기의 기조, 그 행사와 관련된 최근의 보도 내용이나 이슈, 사회적 관심도 등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관련된 자료를 풍부하게 섭렵해야 합니다. 10분 말하려면 100시간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럴듯한 연설문 하나 쓸 수가 있습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8년 동안 연설비서관을 지낸 강원국 씨도 '대통령의 글쓰기'라는 책에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연설문을 쓰는 건 안개가 자욱하게 낀 상황에서 과녁에 화살을 맞히는 것과 같다'라는 말로 그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었는데요. 정말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이런 연설문을 두고 어떻게 하면 멋있게, 있어 보이게 말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부질없는 욕심으로서 소통이 아니라 불통(不通)의 안갯속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연설문은 진실해야 합니다. 말의 유희나 문장의 기교에 빠지면 철학이 죽고 의지가 스러집니다. 그리고 설사 연설문 작성을 도와주는 사람이 곁에 있더라도 지도자는 항상 자신의 철학으로 말 줄기를 열어가야 합니다. 지도자의 발언은 대중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짧은 발언을 위해서도 많은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하지 않으면 할 말이 없어져 다른 사람이 써준 원고를 더듬더듬 읽어 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일이 6'4 지방선거일입니다. 앞으로 4년간 지역의 광역'기초 자치단체의 행정을 총괄하고 감독하거나 교육 관련 사무를 집행하는 등의 중요한 역할을 할 분들이 선출되는 날입니다. 이 중요한 선거에서는 뿌리 없는 말, 족보 없는 말의 향연으로 우리의 의식을 흐리게 하던 자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공부하며 어눌하지만 진심으로 말하던 분들이 선택받기를 기대합니다.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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