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새로운 담론이 필요하다

어떤 사회에서든 담론의 생산을 통제하고, 선별하고, 조직화하고 나아가 재분배하는 일련의 과정들-담론의 힘들과 위험들을 추방하고, 담론의 우연한 사건을 지배하고, 담론의 무거운, 위험한 물질성을 피해 가는 역할을 하는 과정들-이 존재한다. (푸코의 '담론의 질서' 중에서)

'지금 불행하다'는 우리들의 생각들이 점차 내면화되고 있습니다. 부모가 현재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이가 행복을 인식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고려한다면 다음 세대까지 대물림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미 인간의 내면에까지 침투한 불행의 조건들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조건들은 개인적인 의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제도 속에 이미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개인들은 사회적인 조건들을 극복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온갖 담론들이 나타나 이러한 현상을 부채질합니다. 사실, 불행의 조건들을 내면화하여 그것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조건들로 삼은 사람들이 대한민국에는 훨씬 많습니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이 불행의 조건을 만든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지요.

먼저 새로운 담론(discourse)이 필요합니다. 담론을 생산해야 합니다. 담론은 지금 세상이 어떤 모습인가를 드러내는 진술체계(a system of statements)입니다. '지금, 여기'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명제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한가? 아니면 불행한가?'에 대한 근본적인 판단이 그것입니다. 변화는 바로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현재를 진단하지 못한 채 미래를 기획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한 고민을 담론으로 만들어내지 못하면 전반적인 변화는 어렵습니다.

혹시 기존의 담론으로 '지금, 여기'의 내가, 우리가 행복하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우리가 불행하다면 기존 담론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필요합니다. 일종의 대응담론(counter-discourse)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걸 만들어내는 게 교육 담당자들의 의무이겠지요.

그러면 새로운 담론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 것일까요?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연암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비(是非)와 이해(利害)의 두 저울이 있고, 행동에는 네 개의 결과가 나온다. 옳은 일을 해서 좋게 되는 경우, 옳은 일을 해서 해롭게 되는 경우, 나쁜 짓을 해서 이익을 보는 경우, 나쁜 짓을 해서 해롭게 되는 경우. 첫 번째와 네 번째는 문제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선택이다'라구요.

지난 시간 우리가 지금보다도 풍요롭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최소한 옳은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오고, 나쁜 짓을 하면 해롭게 됨을 믿었던 시대를 살았기 때문입니다. '권선징악'(勸善懲惡) '사필귀정'(事必歸正)을 진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옳은 일을 하다 불행하게 살고, 나쁜 짓을 하더라도 이익을 보는 경우도 아주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사람은 현명하고, 옳은 일을 하다 손해 보는 사람을 바보라고 말합니다.

지난날 지금보다도 훨씬 힘들게 살면서도 우리네 부모님들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최근에는 가정에서조차 '착하게 살아라'는 말을 듣기는 쉽지 않습니다. 불행은 거기에서 시작됩니다. 옳은 일을 하다 손해 보는 사람도 불행하고 나쁜 짓을 해서 이익을 보는 사람도 내면적으로는 행복하진 않습니다. 결국 우리 사회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 이익을 얻고,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 일을 교육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름다운 사회, 바람직한 역사를 만드는 것이라고 교육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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