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대중매체 언어, 국민 정서로 귀결

언젠가 운전을 하며 라디오를 듣던 중 깜짝 놀랐다. 코레일의 자동발매기가 고장 나 승객들이 큰 불편을 겪어 분통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분통'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몹시 분하여 마음이 쓰리고 아픔, 또는 그런 마음이라고 적혀 있다. '분통'이라는 단어가 과연 위의 상황에 걸맞을까?

무심코 들으면 익숙한 귀엣말처럼 거슬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얼마나 격정적 언어 속에 단련이 되어 있는지를 이제는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무덤덤하게 지내는 동안 사소한 일들에도 부지불식간에 뇌리 저 깊숙이 박혀가는 강렬한 자극적 언어들이 개개인들에겐 병리적 현상으로 발현되어 가벼운 충돌에도 폭발하게 될 것 같은 불안이 엄습해 온다. 이는 곧 사회구성원의 개별 성향이며 나아가 국민간의 분란과 상식의 틀을 놓고 혼돈하게 되며 궁극엔 한 나라의 국민적 분노의 정서로 고착화 될 우려가 깊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한다. 이른 아침 다음 여정지인 로스앤젤레스행 항공편을 타기 위해 두어 시간 전부터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공항안내방송에서 짙은 안개로 결항이라는 것이다. 기상악화로 빚어진 일이라 어찌할 수도 없고 낯선 이국땅에서 손을 쓸 수 있는 상황은 아무것도 없었다. 체념 아닌 체념을 하며 그 비행기에 탑승하려던 200여 명이 넘는 승객들과 함께 고객서비스 코너에 두 줄로 늘어서서 마냥 다음 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족히 네다섯 시간이 흘러가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 했다. 짜증 나는 필자의 마음과는 달리 다른 승객들은 저마다 앉은 자리에서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휴대폰게임을 하는 등 이상하리만큼 소요 없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붉으락푸르락한 중년의 신사 한 사람이 큰소리로 떠들며 고객 서비스 센터 앞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아뿔싸 코리안이라니…. 조금만 불편해도 큰소리치며 화부터 내고 따지고 책임자 나오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우리의 일그러진 사회상이 오버랩 되어 공항 한편을 메운다.

춘추시대 귤화위지(橘化爲枳) 고사가 생각난다. 귤이 회남(淮南)에서 나면 귤이 되지만 회북(淮北)에서 나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전해온다. 결국 사람도 주위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비유한 고사이다. 미국이라는 땅 그곳에 가서 살면 선진국민이 된다는 말인가. 세계의 모든 종족이 다 모여 하나의 통합된 민주국가의 틀을 유지하는 비결은 엄격하고 공정한 법집행 아래 기초질서 준수와 준법정신이 시민의식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도 20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말로 못다 할 상처 난 역사 속에서 굶주린 아픈 배를 움켜잡고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한 강한 나라임에 틀림없다. 더 이상 부끄러운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내 탓에서 책임을 소중히 실천하는 어른의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한 나라 체제의 유지발전은 이데올로기적 반목과 갈등이 지속되어선 이뤄질 수 없다. 오직 화합과 단결로 하나가 되려는 속성을 가져야만 비로소 공고해진다. 지금 우리는 무엇보다도 사회적 자본이 절실히 필요하다. 사회적 자본은 외부로부터 차관할 수도 없으며 거저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공동체 안에서 창의적 사고로 구성원 스스로 창출해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며 경쟁력인 동시에 강력한 인프라의 요인이다.

대중매체는 사회적 자본의 구심점이며 선진화의 시작이다. 분별없는 언어사용은 국민감정으로 대변되며 오래 두면 부정적 국민 정서로 뿌리를 내리게 된다. 특히 방송매체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계층이 청소년이라 생각하면 더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우등한국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어디에 지향점을 둘 것인지는 기성세대의 몫이다.

남재현/시인'죽순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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